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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소장 Mar 11. 2024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공부를 잘한다거나 수학을 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누군가 그린 그림을 똑같이 따라하는 것을 말한다. 베끼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내는 것, 그런 기능적인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말한다.



키도크고 덩치도 큰 오빠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성숙한 친척 언니들 사이에서 나는 반에서 가장 키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별명이 개미 한마리 였다.


뭘하든 꾸짖지 않는 자애로운 어른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나는 주목받고 싶었지만 늘 개미 한마리 만큼의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오빠는 그림을 잘 그렸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나갔던 모든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다니던 미술학원에서 시상식을 갔던 날, 나는 상을 받지 못했지만 국회의원상을 받은 오빠의 트로피 덕에 친구들보다 두배로 큰 트로피를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오빠는 모범생이었다. 중학교때까지는 공부도 잘했다. 다만 그 기대가 너무 컸고 공부에 관심 없는 동네에서 학군지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고등학교에 가서는 성적이 떨어지는 좌절을 겪어야했다. 그래서 방황하던 오빠에게 엄마는 이런 조건을 내걸었다. 20살부터는 뭘하든 상관없으니 대학만 합격하라고, 다른 사람보다 그림을 더 잘 그렸던 오빠는 미대 입시를 준비했고 합격을 했다. 그리고 1년 후 대학을 자퇴했다.


물론 하고싶은걸 하기 위해 자퇴한것은 아니긴 했다. 사립 미대 등록금은 너무도 비쌌고 IMF로 아빠의 회사는 부도가 난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음악도 하지 못했으니까. 모든 꿈을 접어야 했으니까. 결국 돈보다 중요한 게 많다는걸 알지만 돈이 없으면 중요한 것들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늘 오빠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지만 그건 그림을 잘 그리는게 아니야, 그저 기계적인 기술 뿐이야."


그러면서 미대를 가고 그림으로 상을 받나?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림을 지지리도 못그리던 나는 역사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림도 잘 그리게 되었다. 물론 예술적인 감각이 좋아진게 아니라 그저 관찰력이 좋아졌다고 할까?


역사를 시작하고 내가 달라진 점은 세상을 보는 시선이다.


전에는 아하 그렇구나 하고 지나쳤을 일들에 생각을 입히기 시작했다. 저건 왜 저렇게 된거고 이건 왜 이렇게 된건지, 돈도 안되는 생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약간의 이익도 얻는 생각들이다.


물건을 살 때, 광고를 볼 때 그 이면의 본질을 보려고 노력하다보니 판매자의 심리도 보이고 거기에 혹하는 나의 심리도 보여 더 신중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작은 선택들을 하다보니 실패하는 것도 많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들이 더 많게 되었다.


무엇이 고장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때, 반드시 원인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더 크게 보는 연습을 하다보니 생각보다 더 복잡한 세상에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머리 아픈 일들도 많아졌지만 대체로 짜증나면서 가슴이 답답한 일보다 그러려니 넘어가는 일이 더 많아졌다. 다 그렇게 된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그림, 어떤 모습을 따라 그린다는 것, 어디에 어떤 위치에 어떤 선이 있었고, 어디에 줄을 그으면 어떤 그림자가 지고, 눈동자의 흰부분을 늘리거나 눈썹이 쳐지면 어떤 느낌이 나고, 턱을 짧게그리면 귀여운 그림이 되고 그런 규칙들, 법칙들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것 뿐 , 예술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림이 예술이 되려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오만가지 생각을 점하나 또는 선하나로 표현해내는 그런 작업들, 시선을 잘라 자유롭게 배치하는 새로운 화법을 고안하고 실행하는 작업들, 세상에 없던 것을 내놓는게 예술이다. AI 가 그려내는 작품이 예술이 아닌 이유는 그런거다. 누군가 입력한 세상이라는 것, 어떤 화풍이고 어떤 배경이며 어떤 재질과 소재를 사용할지가 모두 정해져있고 시스템적으로 그려내는 그림, 창작자의 생각을 그려주는 도구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AI가 인간의 상상력보다 뛰어난 콘텐츠를 만들어 낸다면 그건 처음으로 분야를 개척한 예술가로 인정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오만가지 생각을 잡아두고 싶었다. 이후로도 글을 썼지만 심히 산으로 가고 있기에 지워버렸다. 하고 싶은것과 해야하는 것 두마리 토끼를 잡는건 쉽지 않은 일이니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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