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예글방 시즌1(2022) - 글3
직장 동료 A와 연애 이야기를 하다가, 연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 드는데, 문제는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고 나는 너무 평온하다는 것. 딱 한 가지 걱정되는 건 나이를 먹고 있다는 건데, 나이를 먹을 수록 점점 ‘안 팔리게(‘팔린다’라는 표현에 퀴어가 아닌 A는 놀랐고, 나는 게이 사회의 세속성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야만 했다)’ 될 거고, 혹시나 다시 연애를 하고 싶어지면 그땐 너무 늦어져버리는 게 아닐까하는. 설렘을 느껴본지도 오래 됐다는 내 말에 A는 “언젠가 설레게 할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라는 따뜻한 말을 해 줬다. 언제나처럼 나는 “그냥 개나 키우려고요”라는, 반만 농담인 자조와, “근데 개 키우기 시작하면 끝이라고도 하더라고요”라는, 마찬가지로 반만 농담인 걱정을 덧붙였다. 그리곤 자연스레 이어지는 개 키우기에 대한 대화.
연애는 태어나 딱 한 번 했다. 스물 다섯에 만난 스물 둘이었다. 걔나 나나 남자와 연애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아마도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잘 사귀다가 세 달 쯤 됐을 때 그 애가 공익근무를 시작하면서 훈련소에 들어갔는데, 그렇게 헤어졌다. 훈련소에서 나와서 문자를 보내왔는데, 훈련소 들어갈 때 엄마가 두 팔을 잡으며 남자랑 만나는 거 안다고, 울면서 그러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성당에서 ‘레지오 마리애(전세계 가톨릭 교구 내 분포하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는 사람은 보통 독실한 신자로 여겨진다)’ 활동까지 한다는 그 애의 엄마는 하나뿐인 아들이 신부님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고 했다. 되먹지 못한 자식인 나와는 달리 그 애는 가족을 선택했다. 아마도 울면서 보냈을 미안하다는 문자에 답장을 보내면서, 나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 애에게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혼자서 힘들어하고 있을 테니까.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 애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건 딱 2년 뒤였다. 공익근무가 끝나면서 나한테 다시 연락을 했는데, 간만에 아빠집에 내려와있던 나는 일정을 앞당겨 다음 날 바로 서울로 향했다. 홍대입구 5번출구에서 만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같이 일본 라멘을 먹고, 다시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못 가서 이번엔 영영 헤어졌다. 예전처럼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고 했다. 그럴 수 있지. 그렇다면 이젠 정말 끝이었다. 2년을 기다렸어도, 퀴어 신파의 한 가운데서 눈물 콧물 다 짰어도 마음이 없어졌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유가 뭐였을까 생각하다가 관두었다. 어쩌면 내가 가진 게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미래가 없어보였을 수도 있고, 연애를 잘 못 해서였을 수도 있고, 그 모든 것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허망했다.
그 후로 얼마 간은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했는데, 연애까지 가진 못했다. 그 즈음부터 연애를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다른 이유들이 생겼다. 악에 받쳐 물불 안 가리고 퀴어 운동에 전념하다보니 번아웃이 왔고, 그래서 삶에 다른 사람을 들일 여유가 없었다. 돈도, 시간도, 마음도 나누지 못했다. 어느새 나는 돈은 없고, 바쁘고 지쳐있는데, 다정하지도 못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서울 살이를 포기했다.
부산에 내려와서도 별로 달라지진 못했다.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일을 오래 쉬었고, “평범한 직장인이고 비슷한 사람을 찾습니다”라고 써놓은 잭디 속 게이들에게 쪽지를 보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내리 4년을 보냈고, 연애를 쉰 건 7년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회복’이 명목만은 아니어서, 힘들었던 서울살이를 벗어나 부산에서 새 삶을 시작하면서 이제 마음의 여유가 조금은 생긴 것 같다. 또 돈과 시간을 조화롭게 벌 수 있는 일자리도 찾고, 전세집도 구했고, 좋은 친구들도 새로 많이 만들었다. 이쯤이면 다시 연애에 도전해볼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여전히 마음이 안 생긴다.
왜 그런가 곰곰 생각해보면, 사실 여전히 여유가 없는 것 같다. 홍예당 일로 평일주말 할 것 없이 바쁘고, 주 3일만 일하긴 하지만 회사 일도 신경쓸 게 많다. 둘 다 손 놓고 가만히 두면 문을 닫게 될 것 같은 게 문제다(이쯤되면 번아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일만 골라서 하는 내가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더 하면 좋을 일’이 언제나 남아 있고, 하는 만큼 성과가 보여서 일을 놓을 수가 없다. 중독이란 게 이런 건가 싶지만, 내 삶에서 여유를 앗아간다는 것 외에 다른 모든 방면에서 큰 만족을 주기에 일을 줄이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홍예당 활동을 하면서 나는 퀴어 친구들도 많이 만났고, ‘문화기획자’라는 새로운 커리어와 네트워크도 만들어나가고 있다. 퀴어문화 불모지인 부산에서 상시적인 퀴어 모임과 행사를 여는 단체를 운영한다는 뿌듯함은 말할 것도 없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커밍아웃하고도 아무 문제가 없는, 아니 오히려 내 퀴어 정체성과 경험을 소중한 자산으로 여겨주는 동료들이 있는 지금의 회사는 너무도 소중하다. 둘 다 문을 닫는 일만은 어떻게든 막고 싶다는 생각이 커서, 내내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다. 물론 가끔은 한눈을 팔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신경을 못 쓴 결과가 바로바로 보여서 더 놓지 못하게 된다.
MBTI 유형 분류에 따르면 나는 INTJ형이다. 내향형(I)이어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에너지를 소모하고,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회복되는데, 외향형(E)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 적이 많다. 그랬다면 일 때문에 소모된 에너지를 남자 만나러 나가서 충전할 수 있었을 텐데. 내향형인 나는 그저 아무도 없는 집에 콕 박혀 있어야만 휴식이 된다. 아, 정말 나는 연애는 글러먹은 것일까.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싫다. 안 그래도 무한 경쟁 사회에서 숨 막히게 살고 있는데, 연애라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 생각해보니 홍예당을 차린 게 그런 목적도 있었지.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홍예당은 어느새 여성 퀴어들이 활발히 오가는 오붓한 커뮤니티가 되어 버렸고(그래서 뿌듯하긴 하다), 게이들이 홍예당에 왜 관심이 없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고.
개나 키우고 싶다는 건 그런 마음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존재를 원하지만, 관계의 피곤함을 느끼고 싶지는 않은 마음. 그런데 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람 사이의 관계를 너무 도구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감도 못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성애 운동을 한답시고 여기저기 휘젓고 다녔어도 동성애만 알지 사랑은 모르는 사람, 대의만 알고 사람은 모르는 사람.
하지만 대의도 사랑이다. 다정한 관계만으로 사랑이 이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사람을 둘러싼 사회도 다정해야 한다. 내가 해 온 사랑은 그런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보니 아무래도 나는 글렀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좀더 여유를 가져보는 것 정도? 일만 하지 말고 한눈도 좀 팔고, 즐기기도 하고, 사람들과도 좀 어울려가면서 살아가는 것. 그렇게 계속 지금의 일들을 이어가고, 개를 키우고,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 연애를 할 것이다. 내가 해 온 일을 알아봐주고, 개를 좋아하는, 눈썹이 진하고 남방계 얼굴을 가진 키가 작은 남자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