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설 Aug 07. 2020

<소년 아메드>, 같은 자리를 맴도는

폭력의 연쇄, 구원의 불가능성, 시선의 (비)윤리, 우리 모두의 실패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무슬림은 여자랑 악수 안 해요."라는 오프닝의 대사를 염두에 둔 듯 러닝타임 내내 아메드를 감싸고 있던 여성성의 기운도, 생명을 해하려 했던 소년의 사역 장소로 채택된 농장을 가득 메운 동식물의 생명력도, 아메드를 구원하기 위한 극적 장치가 아니었던 거군요. 중반부에 소년원에서 아메드가 변화한 듯 보이는 장면은 그 전 장면과 시간차가 어느 정도 있음에도 그 간격이 전혀 느껴지지 않게끔 편집되어 있고, 또한 아메드의 변화 계기도 묘사되지 않습니다. 변화의 계기보다는 양상 자체가 중요한 걸까,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 아메드는 여전히 이녜스를 죽이려 하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변화한 척을 했던 거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메드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언제나 깊은 절망을 다루었지만, 그리고 설령 희망을 내비친다 해도 그걸 참 먹먹한 방식으로 보여줘 왔지만, <소년 아메드>의 결말은 다르덴 영화에서 볼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절망을 보여주네요.


그러고 보면 2010년대의 다르덴 형제는 전 같지 않게 따뜻했습니다(<소년 아메드>도 2019년 작임이 분명한데, 아무래도 한국 개봉일에 맞춰 머리가 돌아가다 보니 자꾸 2020년 영화 같네요). 저는 이상하게 다르덴 형제를 생각하면 <자전거 탄 소년>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가장 먼저 본 그들의 영화도 아니고, 스크린으로 본 최초의 영화도 아니고, 심지어 그들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다 보니 다르덴 영화는 따뜻하다는 인상이 자꾸만 피어오릅니다. 사실은 착각이죠. 리케가 쓰러진 로제타에게 손을 건넸다고 해서, 올리비에와 프랜시스가 함께 방수포에 끈을 묶는다고 해서, 암전 이후 그들의 삶이 암전 이전과 달리 희망으로 가득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2010년대의 다르덴 영화는 (<소년 아메드>를 제외하면) 모두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의 뒷모습을 고정된 자리에서 멀찍이 바라보는 쇼트로 끝나는데, 거기에는 이상하게 안도감이나 희망의 예감 같은 것이 서려있습니다. 특히나 <내일을 위한 시간>이 그렇죠. 똑같은 앵글로 끝을 맺더라도 <프로메제>의 엔딩에는 이런 따뜻함이 없었습니다(<프로메제>는 오히려 <더 차일드>와 유사한 엔딩을 가지고 있는데, 이 두 편에서 느껴지는 벅찬 감정은 속죄의 숭고함이지 희망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소년 아메드> 안의 여러 요소들이 아메드의 변화에 대한 헛된 기대감을 불어넣었듯, 2010년대의 다르덴 영화들 또한 <소년 아메드>에 대한 착시를 미리 만들어내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소년 아메드>는 무슬림들의 관습들을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저 묘사합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이슬람 문화가 먼 우리에게 참 낯설게 다가오는데, 한편으로는 서구권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때 느꼈을 불편함이나 공포가 떠오릅니다. 그걸 손쉽게 편견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참 얄팍한 일이겠죠(물론 편견이 없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그 밑에는 테러에 대한 기억과 난민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흐르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르덴 형제는 서양 관객들에게 그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을 들이미는 도발적인 작품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면 이 영화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종교 문화에 물든 소년이 끔찍한 일 이후 마음을 고쳐먹고 스스로를 뒤돌아보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기 딱 좋은 설정이죠. 연대를 언제나 중요하게 다루었던 다르덴 형제는, '이 낯선 이들도 사실 우리와 함께 살아갈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말을 할 것만 같으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작년 칸 영화제 당시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 저는 딱 이런 전개를 예상했습니다. 좋은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이고, 또 한편으로는 만든 이의 위치가 어정쩡해지는 이야기이죠. 서구의 감독들이 이슬람의 문화와 그 안에 내재된 폭력적 요소를 그리면서 결국 인물이 그로부터 벗어나는 영화를 찍는다면, 피사체인 소년은 불쌍한 존재로 대상화되고 그 문화는 '악의 축'으로 정립되어버리고 말 겁니다('그로부터 벗어나는' 곳이 유럽이 아닌 다른 곳일 수 있을까요?). 이것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지긋지긋하게 보아왔던 '우리와 적' 구조가 아닌가요.


다르덴 형제는 이 노선을 택하지 않습니다. 반면 그들은 무슬림들의 생활권에 초밀착한 상태로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서구인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들은 아메드의 중요한 소통 대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 안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그중에서도 폭력적인 어떤 극단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다르덴 형제가 선 자리가 아주 확고한 한편으로 굉장히 위험하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년 아메드>가 무슬림을 근본주의적 테러리스트들로 바라보는가? 그렇게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아메드의 엄마와 누나, 그리고 이녜스를 떠올려보면 분명해지죠. 또한 아랍어를 노래로 가르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토론하는 초반부 장면은 영화가 무슬림들을 동질적인 하나의 집단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소년 아메드>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폭력적인 무슬림(이건 결국, '잠재적 테러리스트로서의 무슬림'이 될 수밖에 없겠죠)을 바라보는 시선에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가 이슬람 문화권 내부로부터 반성과 자기비판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소년 아메드>에는 서구의 감독들이 바라본 무슬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는 그들의 변화하지 않는 폭력성과 그 결과, 또한 그들의 최후를 '바라보는 자'들의 절망과 탄식을 다룹니다. 이 영화로부터 폭력 일반과 사과, 용서, 화해를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그렇게까지 유의미한 일은 아닐 겁니다. 이 영화는 생생한 현실과의 고리 속에서 읽혀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르덴 형제는 (서구인으로부터 무슬림으로 향하는) 그 대상화의 시선 방향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 있음을 인지하고도 그렇게 보기를 택했다고,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이에 대해 비판하고 발언하기를 원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건 비단 무슬림들을 욕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겠지요. 통제되지 않는 그들의 폭력성, 그들이 유럽에 가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해하게도 만드는 그 폭력성에 대해 다르덴 형제는 비판할 뿐만 아니라 염려하고 탄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째서인지 <언노운 걸> 이후로 다르덴 형제는 점점 더 현실에 참여하기를 촉구하는 영화들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전거 탄 소년>의 사만다와 <언노운 걸>의 제니를 통해 관조자 혹은 제삼자의 윤리를 이야기했다면, <소년 아메드>에서 그 관조자와 제삼자는 극 중 인물이 아니라 관객입니다.


아메드는 변화하지 않고, 이맘은 입체적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맘은 테러만을 꿈꾸는 근본주의자에 아메드에게 비겁한 평면적인 캐릭터입니다. 심지어 이 인물의 처벌조차 텍스트 바깥에서 이루어지죠.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는 언제나 치졸하고 비겁하며 자기 이익에 약삭빠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프레임 내에서 속죄할 혹은 처벌당할 위엄이 부여되었습니다. 속죄하는 인물들이 주인공일 때는 물론이고, <자전거 타는 소년>에서 시릴의 아빠, <언노운 걸>에서 죽은 소녀의 언니 모두 그러하죠(사만다가 시릴의 아빠에게 "직접 말하"라고 요구하는 그 장면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소년 아메드>에서 이맘은 애초에 위엄이 있지도, 창작자에 의해 존중받지도 않습니다. 그건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감독들이 이맘과 같은 인물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소년 아메드>에는 정반대 방향에서 서구인들의 몰이해를 겨냥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바로 루이즈가 아메드에게 키스하는 장면이죠. 이 장면에서 다르덴 형제는 묻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문화를 가진 이들에게 우리의 문화적 규범을 다짜고짜 들이미는 것은 과연 옳은가. 라스트씬을 제외하면,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이 아주 좋았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무슬림 공동체를 불균질하게 묘사한 것에 이어, 서구인들이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장치 역시 심어두었습니다. 이 영화의 어떤 시선에는 온전히 동의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치는, 한국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왜 소년이었을까요. 여기에는 교육과 문화의 문제를 넓게 다루려는 목적도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메드는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로 간주될 수도 있겠죠. 이렇게 어린아이들에게까지 폭력을 가르치는 문화란 무엇이냐고 우리는 질문해볼 수 있을 겁니다. 관객들은 아메드를 바라보면서 화가 나고 또 다그치고 싶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연민이 동하기도 하고 변화를 기대하면서 응원하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아메드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게 다르덴 형제가 근본주의적 무슬림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됩니다. 아이로부터 희망을 끌어내려는 방법론을, 다르덴 형제는 <소년 아메드>에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 영화의 결말은 너무나 가혹하죠. 똑같이 아이가 추락하더라도 <자전거 탄 소년>과 <소년 아메드>는 전혀 다릅니다.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반성의 여부겠죠. 혹은, 떨어지기 전에 사과를 건네느냐 떨어진 후에 사과를 건네느냐의 차이일 수도 있겠습니다.


<소년 아메드>에서 저에게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요소는 동선입니다. 교정시설 안에서 아메드는 계속 같은 자리를 돕니다. 이어달리기를 할 때 그 트랙은 출발점으로 돌아오게 되어있고, 상담사와 함께 이녜스를 만나는 문제를 논의할 때 두 사람은 같은 자리를 왔다 갔다 합니다(이때 상담사는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을 증언해달라고 부탁하는 아메드에게 그것은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문제라고 말하는데, 이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 중 하나일 겁니다). 무엇보다도 아메드는 영화가 처음 시작했던 돌봄 교실로 되돌아옵니다. 이러한 동선은 변화하지 않는 아메드를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메드가 사회복지사로부터 도망치고 먼 길을 거쳐 돌봄 교실로 돌아왔을 때, 아메드는 돌봄 교실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모든 문과 창문을 밀어보지만 열리지 않고, 결국 아메드는 지붕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오히려 외부에 갇힌 듯한 기이한 느낌을 주는 이 장면은 무척이나 상징적으로 느껴지는데, 아메드의 심리나 상황 등 이 장면이 상징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에게는 특히나 외부의 폭력이 내부를 향해 작동하는 방식 같습니다. 이때 외부-내부는 이슬람 문화권-벨기에를 비롯한 유럽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생각하면 이쪽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돌봄 교실이 무슬림들의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같은 문화권에 속하지만 그 안에서 극단적으로 변질된 이들이 '외부'에 위치한다고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추락은, 비단 '우리 유럽을 공격한 너희 무슬림들'의 추락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한편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는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아메드는 건물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지만, 끝날 때는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이 영화에서 종교가 가지는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이 대비는 높은 곳, 혹은 성(聖)을 향한 몸부림이 결국 속된 추락으로 귀결되는 역설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첫 장면에서 아메드는 형인 라시드를 찾지만(이때 라시드는 아메드가 동질감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지신이 배교자라고 여겼던 이녜스를 애타게 호출합니다. 그리고 결국 아메드를 도와주는 것은, 이녜스인 것으로 드러나죠.


<소년 아메드>의 라스트씬은 늘 훌륭했던 다르덴 형제의 라스트씬들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입니다. 마비된 몸으로 바닥을 기는 아메드의 모습을 길게 담아내는 촬영은 절망이란 무엇인지를 고스란히 시각화하는 듯합니다. 아메드를 내려다보며 구급차를 부르겠다고 하는 이녜스와, 그제야 그녀에게 사과를 건네는 아메드는 화해한 것일까요. 이 엔딩은 관객을 한없이 가라앉게 만듭니다. 이 영화에서 구원의 가능성은 여성성으로 끝없이 제시되고, 결과적으로 아메드에게 도움이 손길을 건네는 것은 (피해자였던!) 여성 이녜스이지만, 저는 이 결말이 '구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대'라고 보기도 힘들 것 같아요. 차라리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향하는 '도움'이죠.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도움은 일방적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혹은 반성과 속죄의 방법으로서 도움을 건넬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년 아메드>에는 반성도 없고(죽어가는 와중에 건네는 "죄송해요." 한 마디를 온전한 반성으로 볼 수 있을까요), 양방향의 도움도 없습니다. 이걸 이녜스로 대변되는 무슬림 내부의 한 집단이 아메드로 대변되는 무슬림 내부의 다른 집단을 도와야 한다는 당위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차라리, 다르덴 형제가 읽어내는 현재 참상의 객관적/상징적 묘사가 아닐까요. 만약 아메드가 회복된다면,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운 삶을 살지 아니면 다시 이녜스를 죽이려 들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의 엔딩에는 누군가를 죽이려다가 자멸한 자와 그를 안타깝게 내려다보는 자밖에 없습니다.


앞서 저는 이 영화에서 관조자 혹은 제삼자의 자리에 관객이 앉아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아메드를 '내려다보며' 탄식합니다. 이때 그 시선은 카메라의 시선이자 이녜스의 시선이며, 이 영화는 관객을 아메드에 이입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어가는 근본주의자를 '내려다보며' 내뱉는 탄식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이때 우리의 자리는 무슬림의 자리이고, 피해자의 자리이며(유럽인들에게 이 위치는 결코 무시되거나 축소될 수 없을 것입니다), 스크린 밖에 앉아있다는 점에서 제삼자의 자리입니다. 저는 이 세 자리에 동시에 앉는 것이 정말 가능이나 한 일인지 궁금해집니다. 다르덴 형제는 그럴 수 있다고 믿었던 걸까요.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들을 제공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분열한 무슬림이자 피해 입은 서구인이자 이 거대한 갈등을 바라보는 관조자의 입장에서 현대사회의 이 처참한 폭력들을 이야기하고 타개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겠지요. 그게 설령 영화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실패할지라도 말이죠. 한 명의 관객으로서 저는, 이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 너무나 회의적입니다. 아메드는 실패했고, 그를 품고 있는 공동체도 실패했죠. 그 공동체가 이슬람 공동체든 벨기에든 똑같이 말입니다. 다르덴 형제도 (애초에 불가능한 기획에 뛰어들었으므로) 실패했고, 한국에서 스크린으로 이 영화를 본 저도 실패했습니다. <소년 아메드>에는 성과가 없고 안간힘만 있네요.


하지만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그 안간힘 정도가 아닐까요(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견해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는 언제나 안간힘을 써온 예술가들이지 않나요. 그러므로 저는 설령 실패했다고 해도 이 영화를 지지합니다. 어쩌면 <소년 아메드>가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바깥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이지, 이 영화에 대해서는 국경을 넘어 더 많은 사람들과 대화해보고 싶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오락영화 <반도>에 대해 이야기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