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의 이너콘서트 Jan 24. 2021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것들

<눈먼 자들의 도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주제 사라마구라는 익숙지 않은 이름의 작가, 그러나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이다. 보통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500페이지에 조금 못 미치는 두꺼운 책을 손에 들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편하게 읽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눈이 멀게 된다고 하는 특수한 상황 설정만으로도 쉽게 몰입하게 된다. 문단 구분도, 따옴표도 없이 계속 이어 쓰는 특이한 문장이라 조금은 산만하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일단 소설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마치 급박한 상황에서는 독자에게 따옴표까지 읽게 할 시간이 없다는 듯, 문장은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심리묘사에 비해 장면 묘사는 세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의 특수성과 등장인물의 치밀한 대사 덕분에 소설 속의 장면은 영화만큼이나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진다.


결정적으로 이 책에 담긴 작가의 인간에 대한 냉철한 시선은,  몇 줄의 짧은 독후감으로 모두 담아낼 수 없을 만큼 깊고 방대하다. 한국에는 98년에 출판되었으니 벌써 20년 넘는 시간이 흘른 것인데,  그 긴 시간의 강을 건너 다시 한번 읽어본다면 그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시선도 조금은 깊고 날카로워졌을 테니 말이다.


(간략한 줄거리)

차를 운전해서 퇴근을 하고 있던 한 남자가 신호등 앞에서 갑자기 시력을 잃는다. 이 남자가 찾아간 안과 병원의 의사와 대기실에 있던 다른 환자들까지 모두 실명을 하게 되고, 이 병은 도시 전체로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백색 실명을 일으키는 병이 전염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부는 초기 감염자와 밀접접촉자들을 어느 버려진 정신병원에 격리한다. 이때 안과 의사의 아내는 아직 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남편을 따라 실명자와 함께 격리 장소로 들어간다. 


병원 건물 안에 갇힌 눈먼 사람들은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건물의 구조는커녕 누가 옆에 있는지 조차도 모른 체 지옥 같은 생활을 시작한다. 배급되는 식량을 받아오는 것부터 기본적인 위생의 문제조차 제대로 해결하기 어렵다. 씻을 수도, 화장실을 찾을 수도 없어 사방에 배설물이 넘치게 되고, 수용자들은 온몸에 자신과 남의 배설물을 묻힌 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무너져 버린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와중에 의사의 아내는 본인이 실명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긴 채 계속 사람들을 도와준다.


몇몇 깡패들이 정신병원에 들어와 식량을 빼앗고 힘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물론 이들도 눈이 멀어서 격리된 것이지만 총이 있었고 육체적으로도 강했다. 깡패들은 음식을 나누어 주는 대가로 각 방에서 여자들을 상납하라고 한다.  의사의 아내도 다른 눈먼 여자들과 함께 성폭행을 당하게 되지만, 용기를 내어 깡패의 두목을 가위로 찔러 죽인다.


격리자들이  병원 밖으로 나왔을 때는  바깥세상도 이미 그들이 있던 정신병원만큼이나 참담하게 바뀌어 버렸다. 도시의 모든 기능은 마비되고, 눈먼 사람들은 무리 지어 좀비처럼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의사 아내와 일행은 함께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이 상황을 견뎌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시력을 잃었던 순서대로 한 명씩 시력을 되찾게 된다.



소설 속에서 정부는 긴급하게 '확진자'와 '밀첩 접촉자'를 버려진 정신병원으로 '격리'시킨다.  그리고 병원의 담장 주위로 총을 든 군인들을 배치하고 이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바로 사살하게 했다. 도시 전체는 정상과 비정상, 안전과 불안의 대비 속에서 눈먼 사람들을 열등한 타자의 집단으로 분류해 버린다.


중세 시대의 유럽에서는 한센병 환자들을 멀리 추방하여 한 곳에 격리하였다. 그 당시 병의 원인도 치료법도 알지 못했으니 무조건 도시에서 떨어진 먼 곳으로 보내 집단을 이루어 살도록 만든 것인데, 심지어 한센병 환자들은 추방당하기 전 관 속에 누워 신부가 집전하는 장례 미사를 치르고 나서 자신의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병에 걸리는 순간 그는  죽은 사람이며, 인간의 존엄성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소설 속의 설정도 중세 시대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걷잡을 수 없는 확산 속도, 병에 걸리면 겪게 되는 치명적인 실명의 고통. 패닉에 빠진 도시는 병에 걸린 사람들을 인간으로서 대할 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60년대에 있었던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스탠리 밀그램의 유명한 실험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기억을 돕기 위해 실험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실험자들은 '고통과 기억의 관계를 평가하는 실험'이라는 신문광고를 내고 참가자를 모집한다. 학생 역할을 하는 실험 참가자(실제로는 연기자)가 목록에 있는 단어를 암기한 후에 말해야 하는데, 단어를 틀릴 때마다 다른 방의 '선생' 역할을 하는 실험 참가자는 버튼을 눌러 전기 충격을 보내도록 하는 것이다. 전기 충격의 강도는 학생이 틀릴 때마다 15 볼트에서 시작해서 자그마치 450 볼트까지 강도를 높이게 된다.


그러나 실험의 실제 목적은 권위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복종하는가에 대한 테스트였다. 고작 단어를 틀렸다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의 전기를 흘려보내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지시에도 과연 사람들은 복종할 것인가? 물론 실험이라고 하는 제한적인 상황 설정이기는 했지만 학생이 살려달라고, 실험을 중단해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데도 끝까지 전기충격을 보낸 실험 참가자는 무려 60%에 달했다. (괴로워하는 학생의 모습을 직접 본 경우는 40%까지 수치가 줄어들기는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60%라고 하는 높은 수치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실험이 끝나고 난 뒤 참가자들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었다. 왜 실험을 중단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자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나 스스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죠."

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라고 말했다. 이것은 2차 대전 전범들이 재판에서 했던 말과 소름 끼치도록 닮았다.


"나는 내 의무를 다 했을 뿐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평범함, 다시 말해 자신의 소임을 성실하게(?) 수행했던 (심지어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무사유가 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사라마구가 이 소설에서 보여준,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된다는 특수한 상황 설정은 한센병 환자를 추방하는 것보다, 학생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는 실험보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생각 없는 놈 무사유자의 사례보다는 훨씬 극단적인 상황이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약한 우리 인간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러나 전염이 확산되는 초기에도 이미, 사람들은 병에 걸린 사람을 '환자'가 아닌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적대적인 '다른 부류의 인간'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환자 격리를 통해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는 정부의 지침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밀그램의 실험 참가자처럼 '권위에 복종'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병원에 격리되어 도움을 청하는 실명자들에게 가차 없는 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눈먼 사람들 사이에서도 부조리함이 나타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눈먼 깡패들이 정신병원을 장악하고 여자들을 성폭행하는 장면에서는, 깡패들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식량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눈먼 남자들이 눈먼 여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기도 하고, 일부 눈먼 여자들은 이 상황을 체념하고 그저 받아들이기도 했다. 작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적나라하게 이 상황을 묘사하는데, 나는 정신이 아찔해져서 책 읽기를 잠시 멈추기도 했다.


피에르 바야르는 책 <나를 고백한다>에서 만약 시간을 되돌려 자신이 2차 세계대전이 있던 시대에 태어난다면, 과연 자신은 독일에 저항하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되었을 것인지를 고찰해 보았다. 그는 자신의 잠재 인격과 윤리적 갈등, 상황이 주는 압박, 그리고 이념과 개인이 갖게 될 두려움에 대해 사유해 보았다.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 본다면 나는 어땠을까? 


일제 강점기에 우리 가족의 생계만을 걱정하면서, 나는 과연 조선인을 감시하는 일본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했을까? 도덕과 이념적 양심에 더 괴로워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80년대 안기부 직원이었다면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 박종철과 같은 대학생들의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부었을까? 오늘도 고단했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자위하며, 그 물을 들고 부었던 손으로 아들에게 줄 꽈배기 봉지를 사들고 퇴근하지는 않았을까? 다행히 대한민국의 방역이 극단적인 코로나 확산은 막고 있지만, 만약 반대의 상황이 되어 확진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게 되었다면, 난 확진자들을 정죄하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이 책에서처럼 눈이 멀었다면 나는 얼마나 내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질문에 어느 하나 대답할 수 없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드러나게 될 내 모습을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육신의 껍질이 무겁고 무기력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눈먼 자들의 도시 中>


작가 사라마구는 이처럼 극단의 상황에 몰린 인간들의 부조리한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도,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통해 함께 살아나갈 수 있다는 삶의 실마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인간의 부족함을 서로 보듬어 주면서 그렇게 시력을 회복해 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인내심을 가져라. 시간이 제 갈 길을 다 가도록 해주어라. 

운명은 많은 우회로를 거치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아직도 확실히 깨닫지 못했는가.

<눈먼 자들의 도시 中>

매거진의 이전글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