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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Feb 02. 2021

알랭 드 보통과 장류진 작가의 서로 다른 시선

<일의 기쁨과 슬픔> 두 작가의 같은 제목, 다른 시선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수처리 시설이다. 하수처리는 인간의 일상에서 아주 중요하지만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작은 행위의 결과를 놀랍고도 상쾌하게 처리해 준다. 화장실에선 언제라도 우렁찬 물 내림 한 번으로 그 흔적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으니, 남자 화장실에서 청소하러 들어오신 아주머니와 마주쳐도 조금은 덜 부끄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우리의 부끄러운 흔적을 감춰줄 만큼의 깔끔한 호의를 베풀어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시에 사는 우리의 일상을 단순화하고 기계화하는 매정한 모습을 갖고 있기도 하다. 분업화되고 기계화된 우리의 삶 역시 쉽게 흔적이 지워진다.


수많은 상품과 서비스의 제조, 생산, 판매, 배송의 과정은 이제 우리의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되었다. 소비자로서 우리는 이런 과정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상품과 서비스는 돈과 치환되는 1대 1의 가치로서만 존재하며, 소비의 과정에서 돈을 지불하는 나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There ain't Nobody!


덕분에 우리의 소비 과정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는 것만큼이나 단순해져서, 인터넷에서 주문 버튼을 누르고 하루 이틀 뒤 문 앞에 놓인 상자를 집어 들기만 하면 된다. 커피 자판기에 커피를 리필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Nobody이듯이, 상품과 제화를 공급하는 과정 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도 우리와 상관없는 Nobody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Nobody이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과 장류진 작가는 서로의 Nodoby가 되어가며 소외되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는 직장인들 삶의 모습을 책으로 담아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선은 같으면서도 사뭇 다르다.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


평생 철학을 하며 작가로서 살아온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에서 현대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직장 업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현상은 냉철하게 관찰하지만 그 의미와 대안은 제시하지 못했다. 본인이 스스로 공감하지 못하는 내용을 그의 특기인 '수려한 문장'으로 표현을 하다 보니 어떤 맥락에서는 조롱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거대한 물류회사의 창고를 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우리는 많은 물건을 실제로 손에 넣을 수는 있지만 그런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함 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중략)

그렇다고 물류 허브를 그냥 보기 흉하다고 묘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곳에는 현대 세계의 많은 작업장의 특징인 무시무시한 아름다움, 영혼이 없고 흠도 하나 없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흉한 정도가 아니라 영혼이 없는 '무시무시함'이라고 말하는 비아냥거림이다. 그나마 이것은 창고와 주변 부지에 대한 얘기였지만 영국의 한 비스킷 공장에 다녀와서는 한 술 더 뜬다.


혼자 부엌에서 잠깐이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오븐을 준비하고, 가루 반죽을 만들고, 라벨을 쓰고)이 유나이티드 비스킷스에서는 따로따로 분리되고,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한 사람의 근무 시간 전체를 차지할 만큼 확대되어 있었다.


비스킷의 모양이 원 모양이어야 하는지 사각형이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비스킷의 상품명, 글자체를 놓고 많은 사람이 모여 논의를 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존 러스킨의 <야생 올리브의 왕관>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낭비 가운데 당신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낭비는 노동의 낭비다."

당신은 아마 '노동을 낭비하는 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니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가? 나는 이보다 인간을 더 철저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의 비아냥은 책 마지막으로 가면 극에 달한다. 아마 나와 같은 월급쟁이라면 상당한 분노와 스트레스를 느낄지도 모르니 주의하는 게 좋겠다.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중략) 밤이 올 때쯤이면 죽을 것이라는 커다란 사실을 외면한 채, 서둘러 칠한 붓이 남긴 페인트 한 방울을 피해 창턱을 계속 열심히 가로지르려는 나방에게서 볼 수 있는 강렬하고 맹목적인 의지가 있다. (중략)


발트해를 가로질러 펄프를 운반하거나, 참치 머리를 자르거나, 구역질 날 정도로 다양한 비스킷을 개발하거나, 상담하러 온 사람에게 전직을 권유하거나, (중략) 탈취제 자동판매기를 발명하거나, 항공사를 위해 강도가 높아진 코일 튜브를 만드는 동안 죽음이 우리를 기습한들 어떠랴. 죽음의 물결에 대항하여 성냥개비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을 때 우리를 발견한들 어떠랴.


뒤틀린 기분으로 거칠게 요약하자면, 너네들은 그냥 그렇게 살다 죽을 텐데, 모르고 죽는 것도 나쁘진 않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좋아하는 팬으로서 사실 이 책만큼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철학자라면, 현실은 냉철하게 보더라도 그 안에서의 의미와 대안은 제시해 주어야 하지 않은가!  


실망이 컸지만, 그나마 번역가인 정영목 씨의 번역 후기 덕분에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깐깐한 독자이시더라도 그의 약간은 방심한 듯한 모습을 가지고 너무 뭐라 하지는 마시기를. 저자인 알랭 드 보통도, 이 책을 번역한 옮긴이도, 또 이 책을 읽는 독자도 모두 일의 기쁨과 슬픔에 흔들리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비슷한 사람들일 터이니.


그의 이 한 마디는, 월급쟁이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알랭 드 보통마저도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직장인'에 포함시켜 주는 놀라운 아량을 보여주었다. 나로서는 원작자보다 번역가의 말에 더 큰 깨달음을 얻는 매우 희귀한 경험을 한 셈이다.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


작가는 알랭 드 보통의 책 제목 <일의 기쁨과 슬픔>을 차용지만 소설의 내용은 알랭 드 보통이 바라본 시선과는 확연히 다르다.


장류진 작가는 판교의 IT업체에서 7년간 일을 했다고 하는데 (그 경험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직장인의 삶을 생생하고 현실감 넘치게 묘사했다. 굳이 위에서 말한 번역가 정영목 씨와 같은 제삼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작가의 소설만 보더라도 장류진 작가가 우리와 같은 Nobody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 속의 작품들이 대부분 마지막 반전을 담고 있어서 책의 줄거리를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시대를 이해하는 작가의 시선을 얄미운 알랭 드 보통의 시선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굴욕감에 침잠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억지로 출근해서 하루를 보낸 그날 저녁, 이상하게도 거북이알은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중략) 그렇게 일주일을 더 보내고 나서 그녀는 모든 것을 한결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中


소설 속에서 일과 직장의 모습은 고단하고 초라하며 비인간적이다.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꺼내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런 부조리 속에서도 등장인물들은 나름 견뎌내고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마치 작가는 '그래, 나도 알아. 많이 힘들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비판보다는 위로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다.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어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 中


알랭 드 보통의 접근 방식은 달랐다. 그는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직업의 부조리함을 비판하면서도 그 일터의 구성원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보내지 않았다. 내일 죽을지 모른 채 일에 몰두하고 있는 '나방'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우리는 과자를 빠르게 만드는 데는 분명히 전문가이지만 아직도 감정적 안정이나 결혼의 조화를 이루어줄 믿음직한 수단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르네는 이런 분석에 더 보태줄 이야기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겁에 질린 표정이 번지더니, 입에서 이만 이야기를 끝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그는 왜 CEO도 아닌 평범한 직원 르네에게 현대사회가 갖는 분업화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말을 건냈을까. 이건 마치 취업청탁으로 고소를 당한 정치인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의원님, 청년들의 실업이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취업청탁을 하신 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는 기자와 뭐가 다른가 말이다. 알랭 드 보통도 이 기자도 답변은 들을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질문의을 가장한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취업청탁을 한 정치인을 편드는 게 아니다. 질문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알랭 드 보통이 질문한 직원은 비리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야근을 하고 있는 불쌍한 중생이었을 뿐이다. 


장류진 작가의 소설들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현대인들이 겪는 일, 사랑, 욕망, 그리고 관계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바로 지금 이 시대의 말로 잘 표현해 내었기 때문이다. 멋 부리지 않은, 지금 내가 쓰는 일상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 공감과 위로의 힘은 더 강력하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 원을 내야 오만 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 이천 원을 내면 만 이천 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잘 살겠습니다> 中


"사실 돈이 뭐 별건가요? 돈도 결국 이 세계, 우리가 살아가는 시스템의 포인트인 거잖아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죠."

<일의 기쁨과 슬픔> 中


젠더 폭력을 주제로 하고 있는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에서는 비판의 대상인 남성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남자를 주인공인 화자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끌고 가는 부분도 신선하고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판받아야 하는 남성을 주인공으로서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주체(비록 실제로 반성하지는 않았지만)로 바꾸어 놓은 것인데, 장류진 작가의 비판이 알랭 드 보통의 일차원적인 비판보다 한 수 위인 이유이다.


그냥 한번 자는 거? 저 아쉬울 거 없는 사람이에요.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래서 온 게 아니라고. 나 오늘 지유씨하고 안 자도 상관없어요. 오늘이든 내일이든 내년이든. 지유씨랑 자고 싶은 게 아니라 만나고 싶은 거예요. 믿어봐요.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몇 년을 기다렸는데, 더는 못 기다리겠어요?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中


진심이 담긴 말은 사람을 감동시키지만, 이 남자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탁자를 내리치며 '씨발년"이라고 말하면서 독자들에게 진심을 드러내는데, 말로 드러나는 진심은 이처럼 깊이가 없다. 적당한 밀땅과 말 몇 마디로 여자를 사귈 수 있다고 믿는 허세에 찬 젊은 남자들을 향해, '너네 속 다 보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中


이처럼 장류진 작가는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젊은이들의 삶을 냉정하게 그려내면서도, 독자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공감하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직장과 관계의 굴레에 묶여 자존감을 희생하며 살고 있는 이삼십 대 들에게, 비록 결혼 축의금을 오 만원 할지 십만 원 할지 고민이 되더라도(잘 살겠습니다), 언제 망할지 모를 위태로운 스타트업을 다니더라도(일의 기쁨과 슬픔), 돌싱이 되었다고 함부로 들이대는 놈팽이가 있더라도(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정규직이 되어도 하루에 만 천 원으로 살아야 하는 초라한 삶일지라도(백 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 우리는 여전히 견뎌낼 수 있으며 삶의 아름다움과 고마운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탐페레 공항)을 장류진 작가는 말해주고 있다.


나는 봉투에 적혀 있는 주소가 맞는지 여러 번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노인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부인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아침밥도 먹고, 늦잠도 자면서.

나는 눈물을 닦고 내가 가진 가장 커다란 노트와 마커펜을 꺼냈다. 그리고 큼직한 글씨로 미루고 미뤘던 편지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탐페레 공항>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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