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왕국 아니고 회사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19살 미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옆팀에 동갑인 친구가 입사했다. 나랑 똑같이 전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들어온 친구라 자연스레 친해졌다. 마음 둘 곳이 없던 나는 미미와 하루 종일 메신저를 주고받으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매일 점심시간에 우리 집에서 밥을 먹고 낮잠도 자곤 했다. 미미와 친해진 뒤엔 남들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내 편이 생겼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미미가 입사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1박 2일 워크숍을 갔다. 대표와 부대표, 팀장님들의 차를 얻어 타고 가야 하는데 어떤 차를 탈지는 제비 뽑기로 정해졌다. 나는 안전 운전을 지향하는 팀장님의 차를 타게 됐지만 미미는 승차감 따위 개나 줘 버린 대표님의 스포츠카에 걸려버렸다. 대표를 포함한 몇몇 임원들은 누가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나 경합이라도 하는 듯 미친 듯이 밟아댔다.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잔뜩 멀미를 하며 온 미미는 짐을 풀자마자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야 우리 오늘 래프팅한대." 갑자기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린가? 바람이 꽤 서늘해진 10월이었다. 이 날씨에 래프팅이라니, 심지어 나는 물 공포증이 있었기에 절대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나 안 하고 싶은데..." 내 말에 미미는 고개를 저었다. 꼭 해야 한다고, 안 하면 대표 눈밖에 나서 고생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밖에서 들려오는 다른 직원들의 말을 들어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작년에도 워크숍에서 래프팅을 했는데 대표가 여직원들 젖은 거 보려고 일부러 일정에 넣는다고, 타당한 이유 없이 참여하지 않으면 저녁 술자리에서 술을 엄청 먹인다며 수군대고 있었다. 대표가 변태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서 별로 놀랄 것도 없었지만 소름 끼쳤다.
래프팅 열외 희망자는 손을 들어 보이라 했지만 다들 눈치보기 바빴다. 생리 중이라며 쭈뼛쭈뼛 빠진 두어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긴팔에 긴바지를 입고 강가로 끌려갔다. 날이 추우니까 빠뜨리지 말라고 말해놨다며 젠틀하게 말하는 대표의 말에 소문만큼 극악무도한 사람은 아니구나 안심했다.
아니, 그는 악마였다. 모든 직원들은 다 한 번씩 물에 빠졌다. 나는 물이 무섭다며 거의 울면서 사정했음에도 강에 던져졌다. 거의 실신 직전에 건져주겠다며 구명조끼를 끌어당기더니 다시 물에 담갔다. 이게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저 멀리 대표가 낄낄거리며 박수를 치고 있더랬다. 나중에 저녁 술자리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날이 추워서 물이 차갑다고 입수 없이 진행하겠냐는 래프팅 업체의 말에 대표가 절대 안 된다고 다 빠뜨리라고 시켰다고 한다. 물에 안 빠질 줄 알고 주머니에 소지품을 넣어뒀던 사람들은 래프팅 후 표정이 싸늘했다. 대부분 여분 옷이 없어 난감해하기도 했다. 속옷만 챙겨 온 미미도 난감한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져온 옷이 하나 더 있어서 미미에게 맨투맨을 빌려주고 나는 반팔티를 입었다.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제일 중요한 워크숍을 하겠다며 세미나실로 모였다. 이제야 업무 관련 교육을 진행하나 싶더니 갑자기 장기자랑 코너로 바뀌었다. 급기야 막내들을 강제로 무대에 올려놓고선 막춤을 추게 시켰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흔들어댔지만 박수쳐주는 건 우리 팀 사람들뿐이었다. 정말이지 혀라도 깨물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녁 술자리는 더 가관이었다. 남직원들이 사발을 하나씩 들고선 대표 앞에 줄을 섰다. 소주를 최소 반 병씩 담은 잔을 원샷하고는 머리 위로 털어낸다. 먹다가 뿜거나 몰래 술을 버리는 사람은 승진을 못한다고 한다. 동물의 왕국이 따로 없었다. 누구는 토하고 누구는 소리 지르고 맨 정신으로 있기가 힘들었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다 슬며시 방으로 도망칠 계획이었다. 눈치를 쓱 보는데 대표의 레이더망에 걸렸다. 술잔을 가져오라길래 아직 미성년자라 술을 마실 수 없다고 거절했다. 순간 대표의 표정이 굳었다. '감히 내 술을 거절해?'라는 표정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구해준 건 팀장님이었다. 팀장님의 아부 섞인 부탁에 나는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하나둘씩 만취한 사람들이 방에 들어와 널브러졌다. 잘 준비를 하고 이불을 펴고 있는데 미미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칫솔을 두고 왔단다. 너만 괜찮다면 내 칫솔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빌려주는 입장이면서 나는 미미에게 먼저 양치를 하라고 했다. 모든 미미를 위해서라면 아깝지 않았다. 옷도 빌려주고 칫솔도 나눴으니 진정한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이 험난한 회사에서 믿을 건 미미뿐이었다.
그런데, 워크숍 이후 미미가 무단결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