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 졸업식 날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는 날, 마지막으로 학교에 가는 날.
그렇게 기다리던 졸업식날이었다.
졸업식날엔 대부분 회사에서 연차 사용 없이 휴가를 허락해 주지만 난 바로 전날 연차를 미리 쓴 상황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자리를 비우기엔 애매해서 졸업식을 포기하려 했지만 팀장님은 그래도 졸업식이니 다녀오라 하셨다. 대신 오후 2시까지 출근하기로. 어차피 졸업식은 정오가 되기 전에 끝날테니 시간은 충분했다.
오랜만에 교복을 입었더니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어.. 원래 교복이 이렇게 작았나?' 고작 몇 달 만에 10대에서 20대가 되었다. 언제나 그랬듯 똑같이 1살을 먹었을 뿐인데 무게감이 사뭇 달랐다. 하지만 교복이 작아진 건 나이의 앞자리가 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몸무게의 앞자리가 변해서였겠지. 터질듯한 단추를 겨우 잠구고선 얼굴에 열심히 찍어 발랐다. 인생 마지막 교복 입은 모습일 테니 아주 정성을 들였다. 엄마아빠에게 이따 강당으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왔다.
졸업식은 늘 그렇듯 시원하고 섭섭했다. 단상에 올라가 졸업장을 받는 순간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아 내적 환호를 질렀지만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할 걸 생각하니 이른 아련함이 몰려왔다. 졸업식날은 평소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들과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엄마는 학교 곳곳에서 나와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진을 함께 찍은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말을 남기고 흩어졌다.
"졸업하고도 연락하자!"
간단히 점심만 먹고 출근할 생각이었는데, 엄마는 외할머니가 오시기로 했다며 샤브샤브집을 예약했다 하셨다. 2시까지 출근하기엔 메뉴 선택부터 이미 글러먹었다. 고기에 칼국수에 죽까지 먹어야 끝나는 데다가 할머니는 큰 손녀 졸업했다며 덕담도 해주시고 용돈도 주시고 하며 아주 천천히 드셨다. 그런 와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하다 팀장님께 문자를 보냈다.
'팀장님 죄송해요, 조금 늦을 것 같아요. 2시 30분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그래, 천천히 와.'
평소 눈치만 주던 팀장님이 그날따라 멋있게 느껴졌다.
집으로 달려가 옷만 갈아입고는 회사로 뛰어갔다. 아슬아슬하게 2시 20분에 도착해서 살금살금 자리로 가 앉았다. 숨을 헉헉거리며 컴퓨터를 켜고 옆자리 사수 언니에게 생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언니는 표정이 어두웠다.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내 쪽으로 의자를 끌고 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 2시까지 온다면서 왜 이제와?"
나와 언니를 감싸고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어쩌면 나는 "졸업 축하해"라는 말을 기대했나 보다. 방금까지 와글와글 친구들과 웃고, 온 가족이 모여 행복한 식사를 했는데 적막한 사무실에 오자마자 혼나다니. 들떠있던 기분이 곤두박질쳐졌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늦은 건 맞지만 겨우 20분이고 팀장님의 허락도 받았다. 팀장님이 분명 전달했을 텐데 왜 이러시는 걸까. 억울했지만 그땐 화가 난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다.
"죄송해요.. 생각보다 식사자리가 늦어져서..."
언니는 한숨을 푹 쉬며 다음부턴 자기한테도 따로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선 꽤 무거운 말을 덧붙였다. 이제 졸업했으니 어리다고 봐주는 거 없다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라고. 그 말이 무거웠던 이유는 언니가 어리다고 봐준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고, 난 여태 최선을 다해서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냐고 되물으려다 언니의 살벌한 표정을 보고선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멋쩍게 웃으며 알겠다고 할 뿐이었다. 언니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나 싶더니 서랍에서 쇼핑백을 하나 꺼내 나에게 주었다.
"졸업 선물이야, 축하해."
아, 이 말을 먼저 들었다면 좋았으련만.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람. 방금까지 화내던 언니는 어디 가고 갑자기 웃으면서 선물을 열어보라 했다. 헤어에센스 세트였다. 평소 자기가 즐겨 쓰는 헤어 에센스라며 뭐가 좋고 어떻게 바르는지 설명했다. 특별히 세트로 비싸게 주고 구매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 마음을 이렇게까지 가라앉혀놓고 정작 본인은 싱글벙글이라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어지간히 난감했다. 평소보다 절반만 일하면 됐던 날이지만 유독 길게 느껴졌다. 혼났다고 하소연할 굥이언니는 하필 휴가였고, 다른 친구들이 졸업식 끝나자마자 간 술자리에 빨리 가고 싶어 발만 동동 굴렀다.
퇴근 후 달려간 술자리는 이미 난장판이었다. 민증 봉인 해제가 된 지 고작 2달 남짓. 친구들의 몰골은 제정신으론 못 봐줄 정도였다. 난 당시 술맛을 깨우치기 전이라 홀짝홀짝 혀만 적시는 수준이었는데 몇몇 친구들은 술맛이고 뭐고 목구멍에 들이붓다시피 했다. 그 광경이 너무 웃겨 옆에 3년 내내 붙어 다닌 아름이를 톡톡 치며 말했다.
"야 쟤네 봐봐 ㅋㅋ미치겠다."
어... 아름이는 보드카를 물처럼 마시고 있었다. 그거 물 아니라며 급히 뺏었지만 이미 아름이의 정신은 강 건너에 있었다. 제 몸도 못 가누고, 내내 변기에 머리 박고 있는 아름이를 챙기느라 기진맥진이었다. 도저히 혼자 집에 보낼 수 없는 상태라 우리 집에 데려왔다. 어떻게든 정신 차리게 하려고 편의점에서 난생처음 숙취해소제를 샀다. 아름이는 한 입 먹고 이게 대체 무슨 맛이냐며 또 게워내기 시작했다. 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약인 듯했다. 이불을 깔아줬더니 기절하듯 눕더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 6시 반에 일어나야 해.. 6시 반.. 6시 반이야... 6시 ㅂ..."
다른 친구들은 내일이 없는 듯 휘황찬란한 거리를 쏘다녔겠지만 우리의 내일엔 가불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고삐 풀린 듯 놀아대는 친구들이 부럽긴 해도 남들보다 조금 일찍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니 싫지만은 않았다. 척이 아닌 진짜 어른이 될 준비를 해야 했다. 누구의 말마따나 더 이상 어리다고 봐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교복을 벗고 책임을 입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