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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나나 Apr 25. 2023

08. 사회는 인맥 빨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흡연

  6개월 차에 접어들자 팀 사람들과 꽤 친해졌다. 마냥 어린애 같은데 어쩔 땐 안에 할머니가 있는 것 같다며 애늙은이 막내로 불리곤 했다. 백반과 국밥을 좋아하고 “그럴 수 있죠.”라는 말을 달고 살아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어느 날은 일하면서 코요태의 순정을 흥얼거렸다.


“워어어~워어어~워어어어어어어~”


 옆자리 사수언니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네가 그 노랠 어떻게 알아?”

 나이를 속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웃었다.


  사실 백반보다 파스타를 더 좋아했고 작은 불화조차 싫어 ‘그럴 수 있지 ‘ 하며 넘길 뿐이었다. 내가 흥얼거린 노래가 코요태의 노래인 줄도 사실 몰랐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알았던 것이 있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고, 어떤 상황이던 유연하게 대처하고, 그들이 아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들과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


하지만 모든 건 오산이었다.


  하루는 팀원 중 한 언니가 아프다며 급히 휴가를 쓰고 출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시간 뒤 그 언니의 SNS에 사진이 올라왔다. 해변가에서 남자친구와 해맑게 놀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하필이면 팀장님은 언니의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었고, 그 사진을 보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팀에 냉기가 돌았다. 언니는 팀 모두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언니는 다음날 팀장님께 사과의 문자만 보내고선 아예 퇴사를 해버렸다. 엄연히 자발적 무단결근이다. 하지만 평소 언니를 아끼던 대표님은 언니와 연락하여 실업급여 처리까지 해주었다.


그 언니는 평소 말이 별로 없었다. 유일하게 말수가 많아질 때는 대표님이 있을 때였다. 대표님과 함께 담배를 피우는 장면도 여러 번 보았다. 아부 섞인 말투와 불쾌한 터치에도 웃으면서 대응하는 언니가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이런 무책임한 행동을 했음에도 돈까지 벌었으니 언니는 승자가 아닐까 싶었다. 못마땅해도, 공평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언니에겐 내가 가질 수 없는(아니, 줘도 갖기 싫은) 인연이 있었으니 관계 특혜를 받은 것이다.


  언니의 빈자리는 어린 남자직원 하씨로 채워졌다. 하씨는 나보다 1살이 많은 오빠였다. 성격도 밝고 팀장님, 대표님과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걸 보니 똑 부러진 사람 같았다. 나이가 비슷하고 즐겨하는 게임도 같아서 금방 가까워졌다. 굥이언니와 셋이 종종 저녁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그렇게 하씨와 친해지는데 불과 몇 주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딱 한 달 뒤, 하씨는 내 월급을 뺏어갔다.


  회사에서는 각 팀 매출의 일정 금액을 팀원에게 지급하는 인센티브 제도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번달 팀 매출 5천만 원에서 1%를 팀장 0.4%, 대리 0.3%, 주임 0.2%, 사원 0.1% 씩 나눠서 지급하는 것이었다.


우리 팀은 팀장 1명, 주임 1명, 사원은 총 4명. 사원이라고 다 같은 금액을 받는 건 아니었고 입사순서로 차등지급되었다. 한마디로 짬순서이다. 무단결근으로 퇴사한 언니가 있으니 다음 달엔 내가 그 언니의 자리로 올라가 인센티브를 더 받고 신입사원 하씨가 내 자리를 차지하게 되겠지 생각했다.


  기대하던 월급날 아침, 명세서를 받고는 한참을 멍하니 쳐다봤다. 저번달 월급보다 약 10만 원 가량이 적었다. 이상하다. 분명 이상한데, 이상한 걸 이상하다 말할 용기가 없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내 위에 언니가 나갔다고 해서 내가 올라가는 건 아니었나.‘ 아무리 그래도 저번달 월급보다 적어지는 건 말이 안 됐다. 매출이 줄어들지도 않았고 승진대상자도 없었으니까.


혼자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팀장님이 개인 메신저로 날 부르셨다.


‘잠시 회의실로 와’


널따란 회의실에 마주한 팀장님과 나 사이에 묘한 기운이 흘렀다. 왜 불렀는지 알지만 모른척하는 나와, 왜 이상한 걸 이상하다 말 못 하는지 답답한 팀장님이 서로 눈치만 보는 상황이었다. 팀장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월급이 줄었지?"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했고, 혹시 지급 비율이 달라졌는지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팀장님은 신입사원 하씨가 나보다 인센티브를 더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이 안 나왔다.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들이 엉켜있었다. 팀장님은 구구절절 변명 같은 이유들을 나열했지만 내 귀에 꽂히는 건 딱 두 가지였다.


“너는 어려서 돈 쓸 일이 별로 없잖아.”

“이번 딱 한 번 만이야, 하씨가 이제 막 입사해서 축하하는 겸사겸사"


돈 쓸 일이 있고 말고를 왜 당신네들이 판단하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물론 팀장님 혼자 결정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당장 너무 화가 나서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속에선 열불이 나고 손을 바들바들 떨리는데 입 밖으론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결정타를 날리는 팀장님.


“담엔 혼자 끙끙대지 말고 나한테 말해.”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린가. 당신네들이 멋대로 정해놓은 일들에 상처받고 화가 나는 건데, 이걸 자기한테 말하라고? 대체 왜? 도대체가 이해되지 않는 일 투성이었다.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는 일도 정도가 있었다.


“팀장님, 어리다고 돈 쓸 일이 없다면서 저보다 고작 한 살 많은 하씨한테 제 몫까지 나눠주는 건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한 번이든 두 번이든 저에게 미리 말씀해주셨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말하고도 놀랐다. 감정적이지 않았고 정확히 할 말을 뱉어낸 내 자신이 기특했다. 팀장님은 처음으로 따박따박 대답하는 내 모습에 조금 놀라셨는지 알겠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셨다. 다음 달에 다시 원래대로 돌려두겠다고 약속도 하셨다. 자리로 돌아가니 뒷자리 하씨가 꼴도 보기 싫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나더러 어디 있다 이제오냐면서 말을 걸어왔고 나는 또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하씨는 팀장님의 사촌동생이었다. 대표님과 팀장님도 사촌, 전무님도 사촌, 대표와 부대표는 군대 선후임. 아주 가 족 같은 회사 그 자체였던 것이다. 남자는 무조건 군필자만 뽑는다던 회사에 21살 미필이 신입으로 들어올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신입 주제에 팀장님, 대표님과 편히 얘기 나눌 때 알아챘어야 했다.


  사회생활의 공식을 하나씩 세워가고 있던 그때, 이 두 사건은 꽤나 큰 충격이었다. 중요한 건 업무 처리력, 소통력, 협동력, 융통성, 순발력 따위가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사회는 인맥빨인 게 아닐까 하며 회의감이 들었다.


  지금은 인맥도 사회생활을 잘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인정한다. 사회엔 나처럼 지나치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치사하게 보일지 몰라도 필요한 사람을 옆에 두며 어떤 방법으로든 원하는 걸 쟁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돈을 많이 쥐고 있는 사람들은 후자인 경우가 많다. “저렇게까지 해야 돼?” 싶지만 그렇게 까지 해도 돈 벌어먹기 힘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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