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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나나 Mar 20. 2024

02. 원룸은 인간에게 해롭다.

안녕하세요. 바퀴벌레와 6년 내내 동거한 사람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 오기 전에 총 세 곳의 원룸을 거쳤다. 방배동, 월계동, 중곡동. 방배동에 동생과 잠시 머물 원룸을 구할 때 나름 준비한답시고 미리 직방이나 다방 같은 부동산 어플로 괜찮은 집들에 하트를 눌러놨다. 평생을 아파트에만 살았으니 부동산이라는 곳도 20살에 처음 들어가 봤다. 생각보다 허름한 구멍가게 같은 사무실이라는 게 1차 충격이었고, 어플에서 본 집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게 2차 충격이었다. 분명 어플 속 방들은 신축에 깨끗하고 널찍한 방들이었는데 부동산에서 보여주는 방들은 왜 죄다 시궁창인지.

빈 방을 보여줬을 땐 다 떨어진 요상 꾸리 한 벽지와 제 기능은 할까 싶은 가구들이 놓여있었다. 혹시 지금 폐가를 보여주는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세입자가 아직 살고 있는 집을 보여줬을 땐 방 전체에 담배 찌든 내가 나거나 발 디딜 틈도 없이 옷가지와 쓰레기들이 뒤엉켜있는 집도 있었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싶더라. 어플에서 본 방과 비슷하기라도 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어렴풋이 그리던 원룸 로망은 그날로 말끔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땐 허위매물이라는 개념조차 몰랐다. 요즘은 많이 개선됐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아직까지 허위매물을 올리는 곳이 많다고 하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아니 조심까진 아니고 나처럼 김칫국만 안 마시면 된다.


    흔히들 꿈꾸는 신축에 깔끔한 오피스텔형 원룸은 지역마다 편차는 있지만 서울 기준 월세+관리비 100만 원은 생각해야 한다. 대충 50만 원 안팎으로 방을 구하려는 나 같은 사람들은 집을 보러 다니면 다닐수록 하나둘 씩 조건을 내려놓게 된다. 분명 처음엔 "4평짜리 집이 월세 50이나 한다고..?" 하며 혀를 내둘렀는데, 지금은 4평짜리 신축 오피스텔이 월세 60만 원이라면 "오? 괜찮네." 생각하는 나다. 이렇게 팍팍한 서울 원룸 가격에 익숙해져 간다.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청년들이 닭장 같은 원룸에 돈을 쏟아부으면서 살아가는 게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게 현실인데 뭐 어쩌겠나. 아, 나 방금 너무 T 같았나? 정정한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안타까워하면서 돈을 더 악착같이 모았다.



     아예 독립하면서 이사한 곳이 월계동이다. 아빠와 함께 부동산에 집을 보러 가서는 방 딱 1개를 보고선 바로 계약했다. (왜 그랬을까?) 학교 앞 골목에 4.5평짜리 원룸. 아마 내 인생 통 틀어 최악의 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가 전혀 들지 않아 빨래에선 쉰내가 났고, 바로 앞 술집은 학기 내내 시끄러운 곳이었다. 가장 최악이었던 건, 내 생에 가장 큰 바퀴벌레를 마주한 곳이었다는 것. 그 집에 사는 2년 동안 나는 건강하지 못했다. 그 동네가 이상했던 건지, 그 집이 방충이 제대로 안 되었던 건지 유독 벌레가 많았다. 난 내가 벌레를 그렇게나 무서워하는 줄 몰랐는데, 빨간 개미떼가 벽 한 면을 뒤덮은 날엔 울면서 에프킬라 한 통을 다 썼고. 새벽 4시에 파다닥 하는 뭔가의 날갯짓 소리에 깨서 휴대폰 플래시를 켰더니 주먹만 한 바퀴벌레와 눈이 마주쳤다. 그날은 집을 버리고 밖에서 밤을 새웠다. 이사하자마자 단 3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벌레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바퀴벌레는 깜깜할 때만 움직인다는 걸 알고선 며칠을 불을 킨 채 잤다. 집을 비우면 그 사이 벌레가 또 들어올까 집 밖에 나가는 것도 두려웠고, 나갔다가 들어올 때면 신발을 벗기 전에 방 안을 빠르게 스캔하는 버릇이 생겼다. 언젠가부터 그런 스트레스를 먹는 거로 풀기 시작했다. 엽기떡볶이 한 통을 앉은자리에서 다 먹고 정신 차려보면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먹을 땐 행복한데 먹고 나면 죄책감과 기분 나쁜 배부름이 몰려왔다. 이게 안 좋다는 건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먹고 싶은 건 먹고 다 게워내니 살이 쪽쪽 빠졌다. 꿩 먹고 알 먹고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식이장애를 앓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엔 피부에 건선이라는 병이 생겼다. 병원에 가보니 명확한 원인이 없단다. 보통 환경적 요인과 정신적 스트레스로 면역체계가 무너지면서 생기는 거라 만성 질병이라고. 몸 곳곳에 보기 싫은 건선 딱지가 퍼졌다. 밤마다 간지러워 피가 날 정도로 긁었고, 어떻게든 가리고 싶어 밴드를 붙이고 다니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해가 들지 않는 습한 집, 벌레에 대한 스트레스와 강박 스트레스, 식이장애 등 몸에 이상이 생길 이유는 충분했다.


     예전에 부모님과 함께 살 적에 내 실수로 집을 날려버릴 뻔한 적이 있었다. 고데기 끄는 것을 깜박하고 외출했다가 침대가 약간 타버린 것이다. 그땐 다행히 집에 계시던 엄마가 탄내를 맡고 빠르게 전원을 꺼주셨는데 그 기억 때문인지 자취를 시작하고 확인 강박증이 생겼다. 고데기를 쓰면 열이 다 식을 때까지 집에서 나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전기장판이나 에어컨, 각종 콘센트를 수십 번 확인했고 현관문은 잠그고 두어 번 당겨봤으면서도 돌아서면 불안했다. 도어록이라 자동으로 잠기는데도... 기계를 믿지 못했고 나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중요한 일정이 있어 서울역에 기차를 타러 갔다가 고데기를 안 끄고 나온 것 같아 다시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수업을 듣다가 현관문이 열려있을 것 같은 느낌에 집으로 뛰어간 적도 있었고, 본가에 내려갔다가 전기장판을 켜두고 온 것 같아 불안해서 다시 서울에 온 적도 있었다. 정말로 고데기나 전기장판이 켜져 있거나, 현관문이 열려있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강박증세로 나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까지 힘들게 했다. 너무 심할 땐 정신과 치료를 받아봐야 하나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나중엔 나름대로의 요령이 생겨 외출 전에 집안 곳곳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두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지옥 같던 집에 2년 계약기간을 다 채우고 난 뒤, 다음 집은 아주 신중하게 계약했다. 방을 다섯 군데 이상 봤던 것 같다. 그중 너무 마음에 드는 집이 하나 있었는데, 조금만 걸어가면 번화가인 주택단지였다. 들어가자마자 방 안에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모습에 반했다. 생각한 예산을 넘긴 집이었지만 내가 어떻게든 벌어서 월세를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역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만 초등학교와 가까워 꽤 안전한 동네였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지만, 남향에 베란다까지 10평이나 되는 공간이었다. 드디어 사람답게 살 수 있겠구나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이사를 했다. 이 집에 이사오자마자 기적처럼 피부병이 많이 호전되었고, 강박증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5층까지 다시 걸어 올라갈 자신이 없어서 고쳐진 것 같긴 하다. )

근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분명 전보다 훨씬 나아진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살면서 계속해서 불만이 생겼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찜질방이 되는 꼭대기층인 게 싫었고, 습하고 허술한 베란다에 바퀴벌레가 출몰하는 여름이 끔찍했다. 자연스럽게 더 큰 집, 더 좋은 집을 갈망했다. 언젠가는 꼭 벌레 없는 깔끔한 신축 원룸에 가겠다고. 그렇게 내 꿈의 상한선은 아파트도 아니고 투룸 빌라도 아닌 좋은 '원룸'이 되었다.



     원룸은 인간에게 해롭다. 좁은 공간이라는 것 자체로도 해롭지만 열악한 환경까지 더해진다면 더욱 끔찍해진다. 그리고 좋은 '원룸'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 까지도. 그래도 몇 가지 얻은 것을 쥐어짜보자면 좋은 집을 고르는 안목이 조금 생겼고 내가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는 걸 깨닫고 관리에 신경 쓰게 되기도 했다. 안타까운 청년으로 남기 싫어 더 큰 꿈을 꾸려고 노력하는 것도 득이라면 득일까. 그래도 득보다는 실이 많은 것 같다.


    혹시 이제 막 방을 구할 예정인데 나 같은 일들이 걱정되는 분이 계시다면 부디 발품을 많이 팔아 최적의 조건으로 집을 구하시길 빈다. 필연적으로 조건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겠지만 어떤 것을 포기할지 우선순위를 정해두면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


1. 벌레 나올 확률이 낮은 집 (이 부분은 유튜브에 검색하면 정보가 많다)

2. 해가 잘 들고 습하지 않은 집

3. 밤에도 너무 어두우면 X , 그렇다고 너무 시끄러운 것도 X

4. 3층 이상

5. 5평 이상


만약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부동산에 가기 전 우선순위를 이렇게 정할 것 같다. 이 중에서 상황에 맞춰 하나씩 포기하면서 최적의 집을 찾겠지. 참고로 내 첫 자취방은 저 5가지 중 충족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 덧붙이자면.. 이 글만 보고 지레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개인적인 경험이니 모두가 이럴 거라는 이야기도 아니며 내가 워낙에 겁쟁이 쫄보에 유리멘털이라 조금 더 유난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냥 아름다운 자취 로망만 가지고 맨땅에 헤딩하는 것 보다야 이렇게 최악의 경우를 알고 염두에 두면 좋을지 않을까? 최소한 나보단 나은 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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