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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Feb 01. 2022

최적의 좌절 경험을 위해

강남역 뉴욕제과 이론

가끔씩 나를 서글프게 만드는 기억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아주 어린시절, 내 인생에 어떤 그늘도, 어떤 숨막히는 숙제도 없던 시절, 모래가 하는 말을 들으며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기억이다. 할머니 아파트 뒤 놀이터 모래더미에 파묻혀 놀고있던  그날 오후를 떠올릴때마다 돌연 행복이나 그리움이 아닌 깊은 슬픔과 절망이 찾아온다. 이제 내 인생에 행복한 시절은 끝났구나하는 절대적인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이젠 할머니도 없고, 그 즐거운 아이도 없다. 별안간 그들은 내 삶에서 다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그런 기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때 그런 완전무결의 행복과 자유를 소유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위안을 얻을 줄도 알게 되었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깊은 우울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아, 이제 나는 다 끝났다. 이제 정말 무엇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가. 다시 시간을 돌려 어린아이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앞으론 정말 무엇을 바라야 할까.


나를 활활 태우고 나면 남는 것

대학에 드디어 붙었던 그 날 역시 떠올려보면, 썩 유쾌하진 않다. 물론 기뻤다. 그러나 기쁨의 거품이 가라앉고 나니 불현듯, 정말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말 다 끝난걸까? 그렇다면 이제 그만 죽고싶다. 이젠 드디어 죽어도 되겠다. 도움이나 관심을 요청하는 말로 들릴까봐 입밖으로 한번도 꺼낸 적은 없었지만 정말 이상한 생각이었다. 나는 꽤나 '정상적'인 사람이라 생각해왔었는데 그런 섬뜩한 생각이 정말 자연스레 들었다. 그게 정말 내 진심이었을까.


그러나 그때부터 수많은 데드라인과의 싸움, 그리고 승리, 그리고 그 후에 찾아오는 어마무시한 공허와의 더욱 치열한 혈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단순히 시험점수만이 아닌 스스로 돈까지 벌어야하는 과업까지 더해졌다. 수많은 과제, 발표, 지원, 면접, 상담, 시험. 거기다가 더해진 무수한 알바들. 카페오픈, 근로학생, 과외, 학원조교, 강사, 검토... 수많은 과업과, 중요성들이 나를 뒤흔들었고, 나는 그것들에 항상 정직하게 최선을 다했다.


내 모든 열정을 주었고 내 가슴을 주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결과는 대부분 좋았다. 기대에 못미치는 것도 있었지만 기대보다도 훨씬 좋은 결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모두의 공통점은 이상하게도 어린시절의 그 온전한 해방과 자유,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이상 시험후 친구들과의 떡볶이나 그 무엇이 기다려지지도, 기다려도 그것이 나에게 어떤 해방감을 주지도 못했다. 성적, 보상, 합격, 통과, 칭찬, 사람의 인정…어떤 결과로도 데드라인 이후 뻥 뚫려버린 것 같은 내 가슴이 채워지지가 않았다. 특히나 돈이 결부된 결과일수록 정말 더 이상하게 결과가 내 손에 쥐어짐과 동시에 나의 몸과 마음을 헐값에 팔아 해치워버린 것 같은 처참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것을 바라며 달려오기도 했을텐데 이런 역겹도록 모순적인 감정은 대체 어디서 오는건지 그게 항상 궁금했다.


이전에는 내가 가진 불로 금과 은을 만들거나 최소 우스꽝스러운 유리공예라도 해냈다고 한다면, 이제는 남은 것도 없이 다 재가 되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끝맛이 너무 씁쓸했다. 누군가는 그런 상태를 평온 혹은 안정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이 꺼진 완전한 암흑으로 느껴졌다. 정말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대단한 성취와 업적을 이루고도 결국 자기 머리에 총을 겨누고 삶을 마감했던 나의 멘토들이 머릿속을 자주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삶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에게도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처음엔 엄마가 날 잘못 키웠다고 생각했다. 엄마만의 아집과 편견을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주입했기에 내가 결국 이 꼴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엔 나라를 탓했다. 10여년을 단 한 순간의 도미노쇼와 같은 시험을 위해 달려가게 만들다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시스템과 환경을 조성해놓았다니 나에게 평생 원망과 욕을 들어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 땐 나 자신을 탓했다. 내 기질과 성격을 탓했다. 생각이 너무 많고 인간의 양면성과 모순을 너무 잘 알아버리는 그런 필요이상의 예민함을 탓했다. 그런데 그건 정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기에 탓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다. 결국엔 양육자도, 환경도 평생 내가 붙들고 원망할 대상이 되어주진 않는다는 걸 가슴깊이 깨달을 때까지 그런 작업이 의미없이 되풀이되었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결국,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가슴을 줄만큼, 내 진주를 줄만큼 최선을 다할만한 가치가 없다. 어떤 걸로도 내 불같은 열정을 충분히 보상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것이 내가 그 무수한 혈투에서 끝도없이 몇년간 얻어터진 후에야 내린 결론이다.


몇가지 의문은 남았다. 이 세상의 일(work)이 이토록 다 쓸모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한 생명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을 완수한 엄마의 기분은 어떨까. 아니, 모든 걸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 만드시고 어떠셨을까. 지금의 나와는 달랐을까. 이 씁쓸하고 비릿한 끝맛 대신에 어떤 달콤함이라도, 보람과 기쁨이라도 있었을까.



강화후 휴지기

행동주의 심리학에는 '강화 후 휴지기'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 쥐에게 레버를 얼마만큼 누르면 먹이를 얻는다는 걸 학습을 시키면 쥐는 그 횟수만큼 레버를 눌러 먹이를 받아 먹고는 일정간격 휴식을 취하는 패턴을 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 횟수를 20번 정도로 늘려놓으면 한번만 눌러도 되었던 때에 비해 그 휴식의 기간, 즉 '강화 후 휴지기'가 더 길어진다는 점이다. 1000번 정도로 늘리면 다시 레버를 누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쥐는 레버를 쳐다보기도 싫어져 레버는 쥐에게 혐오자극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쥐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내가 굳이 저 먹이쪼가리를 먹으러 1000번을 움직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 나 역시 그 실험쥐의 인생같이 그간의 강화를 받기 위한 노력이 너무 고되었고, 시간이 너무나도 오래 걸리었던가 보다. 내가 받은 강화물 역시 나의 삶과 자존감을 획기적으로 바꿀 만한 것은 아니었고 이제는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인 후 반드시 만나는 그 공허괴물을 용감하게 상대해낼  엄두가 쉽사리 나질 않는 것이다.


최적의 좌절-‘강남역 뉴욕제과 이론’

이 저자가 독자들에게 권하는 방법은 '최적의 좌절을 경험하라'는 것이다. 인간이 좌절을 대처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능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축적된 좌절 경험에서 나온다고 한다. 실제로 맞딱드려도 크게 나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되겠다하는 회복능력을 키워주는 최적의 좌절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것들을 맘껏 허용하라는 것이다.


저자가 이에 관해 직접 핸드메이드한 이론도 있다. 이른바 ‘강남역 뉴욕 제과’ 이론.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친구와 강남역 뉴욕제과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는 서로를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서로 즉각적으로 연락할 수단이 없으니 상대가 나타날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했단다. 그럴 땐 주변 경치도 둘러보고, 가져온 책도 읽을 수 있다. 아니면 한참을 멍을 때리며 쓸데없는 잡생각을 할 수도 있다. 혹은 주위 상점을 구경하거나 길을 찾는 행인과 짧은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여러가지 방법을 하나씩 적용해보며 상황을 대처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우리의 회복탄력성을 충분히 높여줄만한 좌절경험이 된다. 우리의 자아를 크게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여러 문제 해결을 시도해볼 수 있기에. 성공해도 좋지만, 혹 당장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 그럭저럭 상처가 아물고, 또 약간은 강해지고, 약간은 더 성장하는 그러한 경험이기에.


그날 이후, 공허함 달래기

나는 오늘도 내 공허함을 살살 달래고 있다. 참혹한 심정이긴 하지만 나에게 이 공허함을 허락해주고, 이 비극적인 좌절을 허용해주기로 한다. 지금 당장은 내가 삶의 의미와 곧바로 재회하진 못했지만 기회가 되면 우린 언젠가 만나겠지. 우리가 언젠가 삶의 한복판에서 만나기로 한 것은 사실이니까. 일단은 시간을 좀 때우기로 한다. 어떤 일(work)을 해야할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진 아직도 정말 모르겠지만 그러다 또 기저선이 회복되고, 또 언젠간 거짓말처럼 불이 지펴지면 뜨겁게 타오를 수 있겠지.


부디 순간의 감정에 속지않길. 아니 속아도 되니까 이상한 결정을 내리지 않길, 아니 이상한 결정은 내려도 되지만 삶을 포기해버리진 않길,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치가 없다고 확신해버리지 않길. 이 공허함에도 맘을 활짝 열어주길. 내가 우주 속의 먼지여서 삶이 의미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정말 자유로운 삶이라는 걸. 그렇기에 더욱 남이 아닌 나에게 진실되게 살 시간밖에는 없다는 걸. 결국 실체가 없는 이 괴물같은 감정들은 모두 언젠간 사라지고, 이것들 모두 하나씩 계단이 되어 내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힘이 되어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언젠가 내가 결국 삶의 의미와 마주하고, 여지껏 살아있었다는 것의 보람과 기쁨을 느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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