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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나의 마음숲 Aug 16. 2021

B급의 나다움으로

12월 1일이었다. 겨울이었지만 그리 춥지 않았다.

진회색 겨울 투피스 정장과 아이보리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투피스를 입기에 날씨가 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앞코가 뾰쪽한 7센티 검정 구두도 신었다.

'또각또각'

구두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인사팀 문을 열었다.

그해 여름, 일주일 동안 연수원에서 봤던 동기들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있었다. 동기들은 나를 보고, 나는 동기들을 보고 서로들 말없이 놀란 기색을 감췄다.

연수원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인 동기들을 보며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여고생답게 깔끔한 학생 패션을 하고 출근한 동기들과 삼십 대 경력직 패션을 하고 출근한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인사팀 회의실을 지켰다.

우리 학교에서 처음으로 K 그룹에 입사시킨 첫 번째 학생인 나는 첫 출근 날부터 선배 없는 티를 내며 오래도록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흙 역사를 남겼다.

첫 출근 룩의 흙 역사는 스무 살의 나에게 이런저런 멋을 시도하게 만드는 자극제였다. 나는 당시 유행하던 화장법을 배웠고 패션을 따라 했다. 90년대 말 립스틱 색은 진한 갈색과 와인색이었다. 두꺼운 입술에 갈매기 눈썹, 스모키 하거나 푸르뎅뎅한 아이섀도가 주를 이루던 화장법은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도, 가을동화의 송혜교도 제시처럼 센 언니 포스를 풍기게 만들었다. 스무 살의 나는 와인색 립스틱을 바르고 갈매기 눈썹을 그리며 통 넓은 청바지를 입고는 땅바닥을 자주 쓸고 다녔다.




스타일 과도기를 겪어내던 스무 살의 내 곁에는 동기 신모가 있었다.

신모는 나보다 3개월 먼저 같은 부서 발령을 받았다. 신모는 빠른 연생이었으므로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럼에도 신모에게선 선배의 향기가 났다. 3개월 동안 먼저 먹은 회사 밥은 그런 힘이 있었다. 신모는 내게 없는 학교 선배가 되어 뭘 모르는 나를 자주 많이 도와주었다.

당시에 처음 나온 엑셀 프로그램을 배우러 나는 열심히 학원을 다녔다. 그랬음에도 복잡한 수식이 들어간 부가세 엑셀 시트나 원천세 엑셀 시트를 불러내 오면 그 시트 위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고 헤맸다.

신모는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고는 독학으로 엑셀을 마스터했다. 신모는 수학을 좋아한다고 했다. 좋아만 하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나도 학원 따위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신모는 수학을 잘했다.

내가 소설을 주로 읽을 때, 신모는 '소피의 세계' 같은 철학 책을 읽었다. 그래서 나도 신모가 읽는 철학 책을 따라 읽었다. 며칠을 잡고 있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소설책을 읽었다.

 신모와 나는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신모는 내가 하는 생각을 거의 다 짐작했다. 하지만 나는 신모의 생각을 반도 채 짐작하지 못했다.

신모에 대해 누가 묻기라도 하면 나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신모가 내 동기라는 사실이 내게 그런 어깨 힘을 주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모 이야기를 하는 나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모는 흰색 티셔츠와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었고 워커를 신었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저런 스타일들로 변신할 동안 신모의 스타일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신모는 1년 뒤 명문대에 합격했고 회사를 떠났다.

신모가 퇴사를 하고 2년이 흐른 뒤 나는 조심스럽게 야간대학을 마음에 품었다. 고졸 여직원이 대학을 가면 퇴사라는 공식을 적용하던 회사에서 나는 허락되지 않은 도전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해 나는 그 일을 감행했다.

합격 통지서를 받고 부장님께 면담을 신청했다.


"부장님, 저 대학 붙었어요."

"그래? 축하한 데이."

"그런데 부장님...... 저 회사 안 그만두고 대학 다니고 싶거든요.”

"그래?"

"네, 제가 알아서 피해 없이 다니면 안 될까요?"

"내가 뭐해주면 되겠니?"

"그냥 그렇다고요."

"그래. 내는 니 대학 다니는 거 모르면 되는 거재?"

"네?"

"내는 아무것도 모른 데이. 됐재?"


부장님은 마지막 말만 남기고 회의실을 나가셨다. 내게 그 말은 대학 합격 통지서와도 같은 허락이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하고 망설였던 말인지 부장님은 알고 계셨다.


매일 6시 반 퇴근 종이 울리면 나는 회사 앞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를 탔다. 그랬음에도 7시가 넘어 학교에 도착했으니 6시에 시작하는 첫 수업은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첫 수업 교수님마다 찾아가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했다. 과제로 대체하라는 교수님, 지각을 반 출석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교수님, 시험을 잘 봐도 B 이상은 줄 수 없다는 교수님 들의 양해를 얻었다. 그렇게 많은 이의 허락과 도움을 받으며 첫 학기를 시작했다.

학교를 다니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짝꿍이었던 대리님이 내 비밀스러운 일을 눈치채며 물었다. 별 수없이 내 비밀을 대리님께 고백했다.

그날 이후, 내게는 모르쇠 요정 부장님과 우렁각시 요정 대리님이 생겼다. 대리님은 시험 기간이면 1~2시간이라도 공부하라며 내 업무와 전화를 대신해 받아 주었고, 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몰래 퇴근해야 하는 나를 위해 1층까지 가방을 가져다주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007 영화 한 편을 찍고 나서 한 학기를 마쳤다.


"약속 있나? 없으면 밥 먹으러 가 제이"

부장님은 당신만의 시그널로 그 시간의 나를 격려하셨다.

그렇게 했으면 장학금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학점은 맞아줬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토록 가고 싶어 갔다면 무언가 남는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그 또한 그러지 못했다. 좋은 어른들의 배려와 평생 가는 친구들을 얻었으므로 나는 그 시간을 위로했다.


20년이 흐른 지금,

나는 비로소 그때의 시간들이 쌓여 만들어놓은 나만의 스타일, 나만의 취향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변하지 않는 나만의 스타일, 취향을 찾는데 나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이다.

며칠 전 둘째가 물었다.

"엄마, 공부 잘했어?"

"음.... 엄마는 공부를 좋아했어"


B급의 나다움으로 오늘도 나는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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