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과 졸업생은 어떻게 보험사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나
처음에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새로운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접하는게 좋았다. 학교에서 학생기자를 했었고, 방송사에서 인턴 기자로 일했다. 일은 재밌었지만 미래는 어두웠다. 아날로그식 취재 방식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무도 뉴스를 안봤다. 한마디로 구닥다리였다.
그 무렵 IT서비스라는 새로운 물결이 왔다. 배달의 민족이 나왔고 토스가 나왔다. 신입생 때는 분명 식당에 직접 전화해서 배달 주문을 했었는데, 졸업 즈음에는 모두가 배민을 사용했다. 심지어 ATM에서 과비를 송금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가 토스나 카카오페이로 송금한다. 서비스가 생활 방식을 바꿨다.
나도 그 물결에 속하고 싶었다. 복수전공을 했다. 매 수업에서 팀플 과제로 IT서비스를 만들었다. 팀플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개발, 디자인, 기획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했다. "나는 개발은 할줄 모르고, 디자인도 할줄 몰라. 그치만 글을 쓸 수 있고 발표도 꽤 잘해. 내가 기획할게!" 그때부터 스스로 서비스 기획자가 됐다.
스타트업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한 IT스타트업에서 인턴으로 일해볼 기회가 있었다. 인턴으로 일했던 2개월 내내 한 프로젝트에 몰두했으나 계약 종료 1주일 전에 무산됐다. 좀 더 안정적인 회사를 가고 싶었다. 큰 회사에 가면 이렇게 하루 아침에 CEO의 한마디로 사업이 뒤집어지진 않을 것 같았다. (순진했네...)
대기업은 다르겠지. 다들 첫 직장은 대기업에서 시작하라고도 하니까 이유가 있겠지. 생각보다 우리나라 IT서비스업을 하는 대기업이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대부분 제조업이랑 유통업이었다. 삼성, 현대, SK, LG는 제조업 기반의 회사다. 신세계, 롯데, CJ는 유통업이었다.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IT대기업은 서비스 기획자 신입 채용이 거의 없었다.
결국 신입이 대기업에서 서비스기획을 하려면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유통업(이커머스), 금융업, SI회사 정도가 위 조건에 맞는 선택지였다. 교집합에 있는 회사들을 마구잡이로 지원했다. 나는 불안한 취준생이었기 때문에 건설회사도 써보고 철강회사도 써보고 기름집도 써봤다. 물론 모두 서류탈락했지만…
한 보험사의 디지털직군 채용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비고란에 "챗봇 서비스 기획"이 써 있었다. 마지막 학기 팀플에서 마침 챗봇을 만들었었다. 왜 금융사를 가야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빈칸이었지만, 챗봇 서비스 기획자에 대한 이야기로 지원동기를 채울 수 있었다. 갑자기 챗봇 기획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꿈을 꾸면서 자기소개서를 후루룩 작성했다.
나는 비록 면접에서 "환율이 오르면 보험사에게 이득일까요 손해일까요?"라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못했지만 합격했다. (아직도 답을 모른다! 지금 생각해도 어려운 질문이다!) 취직이라니! 게다가 서비스 기획이라니! 기뻤다. 순수한 기쁨보다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다. 안도감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주변으로부터 보험사에 왜 가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 나도 뾰족한 답변은 없었다. 붙은 곳이 여기뿐이었고, 운이 좋았고, 얼른 시작하고 싶었다. 회사를 돈벌러가지 왜 가겠어! 보험사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막연한 기대가 하나 있었다.
블루오션일 것만 같았다. 알토스 벤처스의 박희은 심사역이 "'나 이거 할거야'라고 말했을때 사람들이 '그거를 왜 해?'라고 말하면, 바로 그곳이 블루오션입니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보험사에서 디지털? 처음 들어보는 조합 아닌가? 완벽한 블루오션 아닌가? 블루오션이 아니라 침몰하면 배면 어쩌지?
이 배에 얼떨결에 탑승한 나는 엄청난 배멀미를 경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