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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ixotism May 13. 2022

말달리자

어릴적 열광했었던 것들을 어느순간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매일매일 질리게 들었던 노래들인데 제목이 생각이 나지않거나 심지어 가수들도 바로 떠오르지 않게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내가 열광했었던 것들이 더이상 나에게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게 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아예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제 30 중반을 갓 넘은 내가 ‘이런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인가’ 라고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얼마전, 그동안 3년넘게 구독했던 스포티파이에서 애플 뮤직으로 음악 플랫폼을 옮겼다. 집에서 사용하는 홈팟이 스포티파이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연동이 불완전한 것도 있었지만 스포티파이나 애플뮤직이나 둘다 프랑스에서 사용하면 한국음악의 제목이 영문으로 표기되는데 그나마 애플 뮤직이 한국어 제목으로 검색해도 알아서 잘 찾아준다는 것이 바꾼 이유 중 하나였다. 아직 스포티파이와 다른 애플뮤직의 인터페이스에 적응중이긴 하지만 스포티파이와는 또다른 애플 뮤직의 큐레이션 기능이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아직 내 히스토리가 충분히 쌓이지 않아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최근 애플뮤직으로 아무 노래나 임의 재생시켜놓고 운전을 하던 중 그동안 잊고지냈던 나의 가수, 크라잉넛을 다시 만났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명동콜링’의 전주가 흘러나오자 마자 고등학생시절 나의 아이돌이었던 그들이 다시금 생각나는 것과 더불어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추억으로 떠올라 반가웠다. 반가운 재회 이후,  크라잉넛은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다시 추가되었다.


오늘은 조금 힘든 날이었다. 회사에서 많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 수습하느라고 바빠 아이가 소파에서 떨어졌다는 아내의 연락을 받고도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못나보여서 더 힘들었던 날이었다. 급한 일만 대충 처리하고 부랴부랴 회사를 나갈땐 이미 시간은 저녁 8시가 다 되어 있었다. 자기 혐오와 더불어 ‘내가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나’라는 회의감이 동시에 들면서 오만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진, 지친 하루였다.


퇴근길 집으로 가는 트램을 기다리며 무심결에 크라잉넛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마치 내가 고등학생 시절 늦은밤 야자를 마치고 집으로 갈때마다 항상 들었던 것 처럼.


트램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던 중 마침 이어폰에서 ‘말달리자’가 흘러나왔다. 어렸을 적 스트레스가 많이 쌓일때마다 참 많이 들었던 노래였다. ‘역시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말달리자만한 노래가 없지!’라고 생각하며 기분이 그나마 좀 좋아졌을 즈음에 노래가 끝이났다. 아쉬운 마음에 한번 더 들으려고 음악앱을 열었다. 그때 처음으로 ‘말달리자’의 영문 곡명을 보았다. 


‘Speed Up Losers (의역: ‘더 달려 이 x신 패배자 x끼야’)


영어로는 다소 과격한 이 곡명이 한국어 원제인 ‘말달리자’보다 훨씬 더 가사를 잘 표현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과격한 곡명이 역설적으로 하루종일 많은 일로 지치고 나약해져 있던 오늘의 나에게는 무엇보다 따스한 조언, 위안처럼 들렸다. 반평생을 알고 있었던, 하지만 잠깐 잊고있었던, 10대 시절 나의 우상이 30대 중반이 된 지금의 나의 못난 모습을 꾸짖는 것 같았다. 아내와 함께 한국에서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온 이곳에서 가족을 두고 내가 지친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사치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면서 머리가 맑아졌다. 계속 이런 생각으로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열어 트램안에서 미처 끝내지 못했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바보놈이 될 순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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