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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이

오이냉국

by 해라

엄마가 된 후 알게 된 게 한 가지 있다.


가족을 위해 요리한다고 하지만 장 볼 때는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손 간다는 거.


이거는 진짜다.


엄마도 똑같았을 거다, 분명.


여름이 오면 우리 집 식탁 위에는 수시로 오이 반찬이 올랐다.


오이무침과 오이소박이, 그저 토막 썬 오이와 쌈장, 기름에 살짝 볶아낸 것, 그리고 얼음 동동 띄운 오이냉국 등.


그러나 나에게 오이, 하면 역시 음식보다는 팩이 먼저 떠오르기는 한다.


엄마는 주말의 느긋한 시간 때나 일찍 퇴근한 저녁, 늘 얇게 썬 오이를 이마와 뺨 등에 올린 후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티브이를 시청하고는 했다.


앉으면 오이가 떨어지고, 누우면 드라마를 볼 수 없는, 아무튼 그러한 상황인 것이다.


또한 슬픈 장면이 나와도, 웃긴 장면이 나와도 아무 미동도 없었다.


오이야 다시 붙이면 그만인 건데, 오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사력을 다해 무표정을 고수하는 엄마가 재밌어 늘 옆에서 지켜보고는 했다.


언젠가 엄마 옆에 앉아 그릇에 남은 오이를 집어 먹으며 아깝게 얼굴에 왜 붙이냐, 그런 적 있다.


그러자 엄마는 입가에 주름이 지지 않도록 최대한 입을 오므린 채 너는 철면피라서 내 마음 몰라, 라고 답했던 게 생각난다.


철면피, 그럴 때 쓰는 말 아니야, 엄마.


나는 생각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내 피부가 철면피 같기는 했다.


사춘기 때도 여드름 하나 없었고, 그 흔한 뾰루지나 기미도 잘 안 올라왔으니.


반면에 엄마는 피부가 좋지 않았다.


어릴 때 난 여드름 흉이 남아 있었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파운데이션을 늘 두껍게 바르니 모공도 좀 늘어나 있었다.


엄마는 멋을 부리는 사람은 전혀 아니었는데 화장대 앞 자주 앉아 있던 거 보면 분명 콤플렉스였던 것 같다.


그러던 엄마가 갑자기 파운데이션을 바르지 않게 되었다.


아니, 파운데이션뿐 아니라 화장 자체를 관두게 된 것이다.


정확하게는 동생이 수녀원에 들어간 후부터였다.


우리 가족은 물론 동생 또한, 한 번도 종교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동생이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것도 성인이 된 이후로, 그때까지만 해도 이 녀석이 갑자기 수녀가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 했다.


그러나 동생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떠났다.


나는 괴팍하게 슬프다가도 이상하리만치 안도가 되기도 하는, 다소 어리둥절한 감정 속에서 동생을 보냈다면은 엄마는 생각보다 무덤덤하게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성당에 다녔다.


그 무렵, 친정에 간 적이 있는데 안방 화장대 위 화장품이 싹 다 치워져 있었다.


대신에 성모상과 그 옆에 새하얀 이불을 덮은 아기 예수상, 묵주며 성경, 주보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는 화장을 안 한 엄마 얼굴이 더 익숙해졌다.


도리어 피부가 좋아진 것도 같다.


주름이 더 깊어 보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또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더 이상 피부에 신경 쓰지 않으니 오이 팩 따위 하지 않겠지, 라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슬펐다.


오이팩 하는 엄마가 항상 행복해 보였기 때문에.


특히 오이팩을 마친 후 거울을 들여다보던 그 표정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늘 살아내느라 힘겨워 보이던 서른 중반의 엄마 마음속, 오이 풋내처럼 싱싱한 무언가를 슬쩍 엿본 거 같았던 바로 그 순간을.


사실 엄마가 화장만 관둔 게 아녔다.


티셔츠 한 장을 안 샀다.


재킷 소매가 다 너덜너덜거리는데도 입고 다니고, 다 해진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한 번을 작정을 하고 엄마를 백화점으로 불러냈다.


옷 한 벌 사려 하는데 누가 아이들 봐주지 않으면 입어보지도 못한다고 투덜거리자 엄마는 기꺼이 도와주겠다 나왔다.


그래놓고서 막상 만나자마자 중년 여성 브랜드 매장으로 직행하니까 엄마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줄행랑.


내 손을 뿌리친 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먼저 내려가버렸다.


나는 허겁지겁 뒤쫓아가 옷 한 벌 사는 걸로 뭘 그렇게 정색하느냐?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 예수님은 옷 한 벌로 살다 가셨어.


나는 기가 막혀서 하이고, 예수가 옷이 두세 벌 더 있었는지 엄마가 어떻게 아느냐, 쏘아붙이듯 말했다.


엄마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 아니, 그래서 성당 열심히 다니며 무슨 기도를 하는데?


그러자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 동생이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고.


할 말이 턱 막혔다.


엄마, 동생 안 돌아와.


그거는 내가 알아.


나는 생각하면서 속으로 울었다.




● 오이냉국 레시피
① 오이를 채 썬다.
② 반찬통에 물 600ml, 소금 1T, 설탕 3T, 식초 6T, 다진 마늘 1t 넣어 섞는다.
③ ②에다 채 썬 오이와 양파, 홍고추 등을 더 해 넣는다.

● tip
냉장 숙성 후 먹어야 더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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