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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안인사

별 것 없지만 특별한 오늘

우리 만난 지 17,335 일째 되는 날

by 보부장

엄마, 요즘 내가 라디오처럼 즐겨 듣는 방송이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그냥 두 여자 개그우먼들이 사람들의 얘기도 들어주고, 자기네들 주변의 재미난 얘기도 하고 그런 방송이에요. 남들 떠드는 얘기가 뭐가 좋냐고?


카메라 켜놓고 밥만 신나게 먹어대는 것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세상인데 뭘. 나와 비슷한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고민과, 기똥차게 웃긴 해결방안까지 같이 듣고 있다 보면 마치 내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함께 나누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는 배경음악처럼 늘 듣고 있어요.

그 방송에서는 매 회 시작을 할 때 두 진행자가 “오늘은 342 회입니다 우휴~!”라고 신나게 방송을 하는데 그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100회 300회, 500회 이렇게 딱 떨어지는 숫자의 회차를 축하하는 건 특정기념일을 핑계 삼아 이벤트나 홍보를 하기 위함일 거라 생각이 들어도 235 회, 472회 이렇게 별 의미 없는 숫자의 회차도 신나게 그 숫자를 불러주며 즐거워하는데, 한 회차 한 회차를 소중히 생각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방송을 만들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름 없이, 환호도 없이, 응원도 없이 지나가는 나의 지금, 오늘을 생각해 봐요.

굳이 누군가에게 들려주지고 있지는 않지만, 내 인생은 내가 라이브로 만들어가는 나만의 라디오방송, TV연속극인데 왜 환호나 응원을 보내기 어려울까요? 가끔씩은 내가 화가 날 이유, 슬퍼할 이유만 너무 찾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마치 수사극이나 비극 속의 주인공인 것처럼요. 감사일기를 써보면 감사할 일은 쥐어 짜내듯 생각해 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할 때 짜증 나고 화났던 일은 술술 잘도 나오거든요.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긴 해요. 친구들을 만나보면 다들 화나고 어이없던 이야기들을 어찌나 많이들 갖고 있는지, 서로 먼저 얘기 꺼내기가 급해서 순서를 정해야 할 정도니.


매일 그러긴 힘들겠지만 오늘 하루 너를 응원한다고 오늘의 나에게 얘기해 줄게요. 가끔 이렇게 엄마에게 문안 인사도 보내면서요. 엄마도 엄마의 하루에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멋진 할머니였으면 좋겠어요.


오늘 2025년 8월 22일은 엄마가 세상을 만난 지 27,274 일째, 내가 엄마를 만난 지 17,335 일째인 날이래요. 이 긴 숫자는 금방 잊게 되겠지만, 그래도 오늘 우리에게 건강히 그리고 무사히 다가와 준 우리 처음 만난 17,335일째인 오늘을 응원할게요!!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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