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인내
70이 넘으신 우리 엄마세대에서는 결혼상대를 보지도 않고
선자리가 오가고 이내 양가집안에서 허락이 떨어지면 결혼에 이른다.
드라마 사극에서 보았다.
한 나라의 왕이 왕비를 간택하는 순간을...
그렇다.
그 옛날 왕이 아니고서야 누구라도 결혼을 하더라도
여인들은 머리에 저고리를 두르며 혼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세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결혼생활은 이혼이라는 단어를 모른 채 지금껏 잘 살아오셨다.
지금은 어떠한가?
충분히 몇 년씩 연예기간을 갖고도
이혼율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댜.
시어머니의 남자와 결혼을 이어오는 동안
고통과 인내라는 단어를 마음속 깊이 잘 새겨온 듯하다.
가난이 싫었다.
지독한 가난의 대를 끊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의지대로 삶이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알 수가 있었다.
누구나 결혼은 처음이다.
물론 요즘은 다수의 결혼이 흔하다.
그럼에도 첫 결혼은 모두가 처음이다.
시어머니의 남자의 통장에 찍히는 급여는 80만 원이 전부였다.
시어머니의 남자는 그저 건물주아들일 뿐이었다.
그러하기에...
평범한 가정과 똑같이 아이들을 키우며 과소비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며
내 집마련의 꿈을 꾸며 결혼생활은 시작되었다.
결혼 후 1년
그땐 나를 자책하는 법도 이혼이라는 단어도 감히 모르는
어린아이들의 엄마가 되었다.
20대에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철없던 엄마는 작은 월급으로 아등바등거리며
아이들을 키우기에 급급했다.
작은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시어머니의 남자는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다.
어린 여자는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기 몹시 힘들었다.
시련이 닥쳐오면
인간의 본성을 볼 수 있다.
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아이들은 아직 어렸고
참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내가 무얼 잘 못했는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쳐왔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통에 숨이 콱콱 막혀 왔다.
두 달 후
다행히 시어머니의 남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살면서 비바람과 태풍으로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을 묵묵히 잘 버티며
비바람과 태풍으로 흔들리다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오면 된다.
젊음이라는 선물은
비바람과 태풍도 뚫고 나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