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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뭉 Nov 27. 2021

#2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네 얼굴에 사표를 던지고 싶어

그렇게 10년의 세월을 서초동에서 좌충우돌 보내다가 어느덧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법무법인은 관공서 고문 변호사로 선임되어 할당되는 일을 해야 했는데 그 일 중에 하나가 시효 연장 소송이었다. 한 달에 많게는 200건의 소장을 접수해야 했고, 쏟아지는 입증서류를 보고 판단해서 서증을 분리해서 입증자료를 준비해야 했고, 변론이 있거나 다툼이 있는 사건은 준비서면과 변론기일 준비를 병행해야 했다. 변호사도 나도 처음 하는 업무인 데다가 관련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였고, 난 사흘 밤낮을 야근을 했음에도 일이 줄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소송을 진행하면서 진행 중인 소송들을 정리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했는데 단순 반복적인 업무가 많아 전혀 관리도 안되고 있었다. 관공서에서는 관공서답게 소송의 진행과 절차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피드백을 주기적으로 요청하고, 다른 구성원 변호사들은 한 명 씩 각기 다른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여 그 와 관련된 부수 업무를 던지기 시작하니 총제적 난국이었다(그들은 내 월급을 십시일반 했으므로 한 명 한 명 모두 나의 고용주와 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인력 충원을 강력히 요청했고, 회사에서는 쉽게 승낙하진 않았지만 결국 인원을 충원하게 되어 궤도적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으며, 관공서 담당 차장과는 제법 손발을 맞춰 가며 진행 및 관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결국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내가 다니던 법무법인에는 약 10여 명의 직원이 있는데 그중 8명 정도가 여직원이었고, 내 위에 여자 상사가 하나 있었으며 난 차석 정도 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분은 전부터 내가 뭔가의 성과를 인정받기 시작하면 항상 여직원들을 동원해서 괴롭히곤 했었는데, 별거 아닌 사소한 것들, 단체로 약속이나 한 듯이 인사를 안 하고 다닌다던지, 혼자 남겨 두고 다른 직원들을 모아서 회식을 하러 간다든지, 비용처리를 늦게 해 주거나, 비품을 안 사주는 등부터 시작해서 과거 내 비밀스러운 치부들을 전달하는 큰 일까지 골고루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앞서 채용했던 직원 역시 그녀의 레이더를 벗어날 수 없었고, 언제부터인가 내가 지시하는 일을 불쾌해하고, 진실되게 상의하고자 요청한 면담에서도 자기는 아무 문제없다고 하면서 면담이 끝나고 나면 그녀와 함께 화장실로 가버리니 당최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랬던 그녀는 결국 3년을 채우는 어느 날 이직을 하겠다며 사표를 내었고, 난 그동안 업무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진심 어린 마음을 전달하며 그녀를 보냈다. 


그때 뇌리에 스친 생각은 더 이상 이런 곳에 머물면서 월급을 받기에는 너무 회사와 사람이 후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벗어나면 더 나은 희망이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일담이지만 어느 회사에 어느 사람도 후지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밖에서 자랑스러운 아버지, 사랑스러운 어머니들도 조직에만 들어가면 후져지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시스템과 조직도 당연히 후져지게 됨으로,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이 "음 난 아닌데 좋은 사람들과 파이팅 넘치게 공동의 목표를 해결해 나가고 있는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대는 축복받은 사람일지 모른다. 


그렇게 그 직원이 퇴사하고 회사에서는 사람을 뽑기를 주저했으며 다시 내가 혼자 모든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친구가 많이 도와준 덕에 나름 체계가 잡혀서 전보다는 훨씬 일하기가 수월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난 이직을 준비했다. 더 이상 변호사한테 가서 물어볼 때 "알아서 해보세요, 찾아서 해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더 이상 기존 월급으로 살기 어렵다는 생각에 모험을 결심했다. 


난 항상 아침 7시 정도에 출근해서 업무 준비를 했었는데, 사람이 없는 그 시간을 틈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경력기술서를 수정하고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공고가 올라오는 즉시 이력서를 제출했었다. 

결과는 항상 쓰디쓴 고배였다.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몰랐다. 스펙이 안되나? 경력이 부족하나? 아예 면접의 기회조차 없는 상태가 반복되자 지치고 힘들었다. 


그러던 중 면접을 볼 기회가 생겼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당시 그 회사는 인터넷 서비스 업체였는데 법무와 채권업무를 겸할 인재를 요구했었고, 질문은 평이했다. 

담보물권 종류라던지, 소송절차 진행에서  발행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하여 질문을 했는데 면접이 끝나고 마지막에 나눈 얘기가 충격이었다. 


사실 나에게 면접 기회가 올 게 아니었는데 앞서 합격했던 친구가 거절하게 되어 면접이 성사가 되었으며, 지금 근무하는 법무법인 경력은 기업에서는 경력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직급을 한참 낮춰서 입사를 해야 할 것인데 감수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당시 난 10년 정도 경력이 있었는데 입사를 하게 되면 사원이나 마찬가지로 입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내 나이가 삼십 대 후반에 이르렀으므로 앞일을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나고, 집 근처에 있던 나름 인지도 있던 회사에서 공고가 떴을 때 난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이었고, 면접에서 그러던가 말던가 집어넣어나 보라던 동생의 말에 별 생각 없이 지원한 것이 덜컥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면접 하루 전날 밤 혹시 모를 질문에 대비해 지원림 선생님의 민법 서적을 한번 읽고, 회사에는 연차도 쓰고, 곱게 정장을 갈아입고, 그곳으로 갔다. 


면접은 그냥 평이했다. 왠지 좀 이상했다고 할까? 업무적인 사항들을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마치 네가 알고 있는 걸 다 말해봐라는 식의 말 주변 없는 면접관 그리고 지금 일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 일을 못해서 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그 사람의 말에 난 평이하게 누구나 그렇듯이 "네! 맡겨 주시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하고 만약 입사를 하더라고 지금 회사의 과장 직급은 어렵고, 대리로 입사하게 될 수 있지만 일을 잘하면 금방 승진할 수 있다는 말에 당당히 오케이하고 나왔다. 


그리고 며칠 후 면접에 합격했다며 언제부터 입사가 가능하겠냐는 말에 1주에서 2주 정도만 시간을 주면 정리하고 가겠다고 협의를 하곤 재직 중인 회사에 퇴사하겠다고 말을 했다. 그즈음 난 이미 외부 일은 바로 밑에 남자 직원과 오래 합을 맞춰 따로 인수인계가 필요하진 않았고, 기관 업무는 담당 변호사와 비서가 있었으니 수월하게 인수인계를 하고 나올 수 있었다. 


나오는 마당에 굳이 나쁜 티 내고 싶지도 않았고, 다니는 내내 집어 던지고 싶던 사표도 집어던지고 싶지 않았다. 맺힌 건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사서 쓰던 듀오백 의자는 남자 직원에게 전달하고, 기관에는 양해를 구하고 업무를 줄여 진행 중이던 소송 건들은 거진 다 종결을 하고 서류를 넘겨주고 나왔다. 다만 뭐 꼭 "안녕 잘 있어!" 안 해도 되는 사람들은 패스하고, 그렇게 박스 하나 차에 싣고, 서초동을 떠났다. 


그리고 퇴직금으로 제주도 비행기표도 하나 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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