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과 코로나 이후 한 동안 아주 흥행하거나, 아주 칭찬받은 한국 영화가 없다.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다. 그 조금 전까지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이어지면서 거듭되는 영화의 흥행이 공식이 생겼고, 영화가 품어야 하는 감성은 그 '카타르시스적' 공식 안에 이미 조금씩 냉동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 오랜만의 <벌새>라는 독립영화를 통해 그 시대 삶을 살았다는 감독 혹은 시나리오 작가의 날 것 그대로의 감성을 마주할 수 있었다.
주인공은 1990년대 대치동 은마아파트, 미도아파트, 대청중학교, 진선여중을 오간다.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보고 듣는다. 그 시절 그곳을 오가던 추억은 오늘날 우리 언론이 다루던 대치동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과외 금지가 풀린 후 가장 먼저 고개를 든 학원가 대치동은 그 교육의 기회를 유지하고 누리게 하기 위한 부모들의 희생으로 지탱되었다.
이 시대를 그린 <벌새>를 가부장적 시대 희생된 가족의 이야기라든가, 586을 비난하는 또하나의 키워드로 쓰는 평들도 많이 있다. 하긴 평론 역시 한국 영화와 함께 성장했으니, 평론의 감성도 영화의 시대 감성과 함께 냉동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은희의 부모 세대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인, 정치도 경제, 교육까지도 군대식, 아니 군대 그 자체였던 시대의 사고방식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 그래서 이 시대에 성장한 사람들이 아는 자식 사랑의 표현 방식은, 경제적 풍요, 공부할 기회, 좋은 것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 대신 ‘아빠가 너희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고생하는지 알아?’라는 말을 한다. 그 시대를 이해한다면 이 말을 ‘생색’이라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부모의 시대는 공부를 잘했어도 돈이 없어 서울대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한 시대였고 군대식 사회는 서울대 간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철저하게 서열화돼 완성되었다. 그 아쉬움은 성인이 되어 이어졌고, 그래서 교육의 기회를 우선적으로 주고 싶은 이 시대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게는 늘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부모 마음 그 자체다.
즉 이 가족은 서로 때리고 할퀴지만 알고 보면 누구보다 서로 사랑하고 있다. 다만 그 소통 방식을 서로 이해하지 못할 뿐. 어제 집어던지고 때리며 부부싸움하던 부모가 아침에 태연하게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모습이 낯선 은희. 14살의 은희는 아직 본능적 사랑 표현 방식이 막연하지만 그립다. 맛보지는 못했지만, 시대에 의해 훨씬 인간적이 된 부모의 소통 방식이 어색한 건 그 때문이다.
그런 사랑은 가족 중 하나의 구성원이 사라지거나 크게 다칠 정도의 위기에서 처해서야 가까스로 드러나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이 영화에서는 두 명의 '가부장'이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사고를 물려받은 큰아들 대훈도 툭하면 여동생들을 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훈은 큰동생 수희가 성수대교 사고를 모면한 것을 알고 크게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는 막내딸 은희의 얼굴에 수술 흉터가 남게 될 것을 걱정해 눈물을 흘린다.
이 영화를 통해 그 때 우리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삶에 대한 애착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82년생 김지영>은 정신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벌새>의 81년생 김은희는 자기 힘으로 상처를 딛고 다음 생을 준비한다. <82년생 김지영>은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원망이 맞지만 <벌새>의 주제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 증거다. <벌새>는 슬픈 것 같지만 알고보면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 다만 이런 일상을 아직까지도 '평범하다'고 말할 정도라면 우리 사회는 좀 더 행복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