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마사지 삼인조가 읽었던 글 중 구미가 당긴 단락을 공유합니다.
역시 정수는 요약이 아닌 원본에 있습니다. 저희는 그저 사견이라는 이름의 양념을 칠 뿐입니다.
0. 이 책은 소설이 아닌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처럼 유려한, 하루키 특유의 잔잔하게 톡톡 튀는 문체가 인상적이기에 별도의 편집 없이 전해드립니다. 책을 주문하기 전 ‘소설가’라는 직업을 미래에 둔 적이 없어 하루키가 정말 소설가 지망생을 위한 책을 쓴 것이라면 어쩌지, 라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역시 괴상한 걱정이었습니다. 주체적인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만인에게 통용될 수 있는 본인의 경험담과 생각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이상한 염려를 가지신 분이 혹시 계신다면 넣어두셔도 좋을 듯합니다.
1.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같은 것입니다. 로프는 틈새가 넓고 편리한 발판도 준비되었습니다. 링도 상당히 널찍합니다. 참여를 저지하고자 대기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습니다. 그런 쪽으로는 애초에 어느 정도 포기해버린 상태라서 ‘좋아요, 누구라도 다 올라오십쇼’라는 기풍이 있습니다.”
2.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거기에는 뭐랄까,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3. “‘이 세상에 소설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다’라는 의견이 있어도 당연한 것이고, 그와 동시에 ‘이 세상에는 반드시 소설이 필요하다’라는 의견도 당연합니다. 그건 각자 염두에 둔 시간의 스팬(span, 차이, 범위)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4.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효율성 떨어지는 우회하기와 효율성 뛰어난 기민함이 앞면과 뒷면이 되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중층적으로 성립합니다. 그중 어느 쪽이 빠져도(혹은 압도적인 열세여도) 세계는 필시 일그러진 것이 되고 맙니다.”
5. “소설을 쓸 때 ‘문장을 쓴다’기보다 오히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에 가까운 감각이 있습니다. 나는 그 감각을 지금도 소중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컨대 머리로 문장을 쓴다기보다 오히려 체감으로 문장을 쓴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리듬을 확보하고 멋진 화음을 찾아내고 즉흥연주의 힘을 믿는 것. 아무튼 한밤중에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새롭게 획득한 나 자신의 문체로 소설(비슷한 것)을 쓰고 있으면 마치 새로운 공작 도구를 손에 넣었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습니다.”
6. “시간을 들이면 이보다 좀 더 좋은 것을 쓸 수 있다—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이 소설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사람치고는 상당히 오만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견해를 솔직히 말하게 해주신다면, 그 정도의 오만함 없이는 애초에 소설가라는 건 될 수 없습니다.”
7. “<봄의 제전>을 들어도 현대의 청중은 그렇게 당황하거나 혼란에 빠지지는 않지만, 지금도 역시 거기에서는 시대를 뛰어넘는 신선함과 박력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감은 하나의 중요한 ‘참고 사항(reference)’으로서 사람들의 정신에 편입됩니다. 즉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들의 기초적인 자양분이 되고 가치 판단 기준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8. “극단적으로 말하면, <봄의 제전>을 들은 적이 있는 사람과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은 음악에 대한 인식의 깊이에 얼마간 차이가 생깁니다. 어느 정도의 차이인지,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는 없지만 뭔가 거기에 차이가 생겨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9. “‘제삼자 도입’ 과정에서 내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트집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수긍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씁니다. 지적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상대의 조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고치기도 합니다.”
10. “그런데 방향성이야 어찌 됐든,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그 부분을 고쳐 쓴 다음에 원고를 재차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생각건대, 읽은 사람이 어떤 부분에 대해 지적할 때, 지적의 방향성은 어찌 됐건, 거기에는 ‘뭔가’ 문제가 내포된 경우가 많습니다. 즉 그 부분에서 소설의 흐름이 많든 적든 “턱턱 걸린다”는 얘기입니다.”
11. “그리고 내가 할 일은 그 걸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거하느냐는 작가 스스로 결정하면 됩니다. 설령 ‘이건 완벽하게 잘됐어. 고칠 필요 없어’라고 생각했다고 해도 입 다물고 책상 앞에 앉아 아무튼 고칩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장이 ‘완벽하게 잘됐다’라는 일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으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