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안 Jan 11. 2023

씨줄과 날줄이 은밀한 테피스트리를 만들어간다.

넬라의 비밀책방:사라 페너: 하빌리스:2021

보라색 표지에 한 여자가 벽장 뒤에서 절구에 무언가를 빻고 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런던 브리지가 보인다. 벽장뒤는 붉은빛인데 앞쪽은 판자와 곰이 그려진 하늘색 약병이 등장하고 여자가 빻고 있는 곳에서 나온 연기는 누군가가 들고 있는 컵으로 흘러 들어간다. 띠지 안쪽을 보면 지저분한 계란 프라이가 보이고 그 위로 열매와 벌레들이 보인다. 금박으로 적힌 제목이 런던 브리지 위로 반짝이며 적혀있다. "넬라의 비밀약방" 그리고 책의 띠지에는 18세기 독약가게와 현대 런던이 교차하는 독과 복수와 반전의 미스터리라고 적혀있다. 책의 뒷면을 보면 "그곳엔 여자들만 살 수 있는 독약이 있대"라는 말과 함께 "18세기 연쇄 독살사건을 둘러싼 세 여자의 은밀한 모험"이라고 책의 뒷면에 적혀있다.


책의 앞면과 뒷면에는 책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고 하나도 담고 있지 않기도 하다. 책의 표지에 복잡하게 그려진 그림은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의 소재이다. 나는 책의 제목과 설명을 보고 넬라의 비밀약방에 나오는 넬라를 상상했다. 강하고 멋진 여성 캐릭터가 은밀하게 여자들의 복수를 돕고 그녀들을 이끌어 가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넬라의 멋진 기록들을 파헤지는 현대의 여성을 상상했다. 세 여자의 모험이라고 했지만 나머지 한 명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자는 내가 상상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 명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 남자에게 배신을 당했으며, 그로 인해 마음이나 몸이 망가졌다. 특히 넬라는 몸과 마음의 상처가 모두 깊어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이다. 그녀에게 남은 마음은 엄마의 유지를 지켜나가는 것. 그렇지만 상처받은 마음은 그것 조차 삐뚤게 표현되어 버리고 만다. 삐뚤어진 마음이 독약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약을 사러 온 12살의 엘리자라는 소녀를 만나면서 넬라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장부는 내 인생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내가 도와주었던 사람들과 내가 해쳤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내가 어떤 팅크나 고약, 혹은 물약을 사용했는지, 누구에게 무엇을 언제 얼마나 주었는지를 말해주었다. 그 장부를 가져가는 게 현명할 것이다. 그래야 그 모든 비밀이 나와 함께 템스강바닥으로 가라앉을 테니까. 글자들이 번지고 종이가 녹아내려서 이 장소에 관한 비밀이 묻혀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들 모두가 지워져 버린다.


그 여자들은 여왕도 대단한 상속인도 아니었다. 도금된 가계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여자들이다. 엄마는 병을 완화시켜 주는 약을 제조했고 그 모든 여자들을 장부에 기록해서 남겨두고자 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주고자 했다.

(넬라의 이야기) p. 321


현대 영국에는 미국에서 여행을 온 캐롤라인이 있다. 캐롤라인은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남편과 함께 영국에 여행을 오기로 했지만 남편의 배신을 알게 되어 상처받은 마음으로 남편에게 혼자 가겠다고 선언하고 런던을 오게 되었다. 여전히 마음은 피폐하고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무리를 따라 런던의 오래된 진흙을 뒤지는 체험에 참여한다. 그리고 캐롤라인은 그곳에서 어설픈 곰이 그려진 하늘색 약병을 발견한다. 캐롤라인은 어찌어찌 그 약병의 이야기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가는 중에 자기 자신도 찾아간다.


 “어느 순간, 난 나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10년 전 에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나 자신을 꿈꿨었지. 그 꿈을 완전히 버리게 될까 봐 두려워."

“하지만 사람들은 변해, 캐롤라인, 당신은 지난 10년 동안 성숙한 거야. 옳은 것들을 우선시했고, 변해도 괜찮아. 당신은……….”

“그래, 변해도 괜찮아." 내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일부를 숨기고 파묻어 버리는 건 괜찮지 않아. “

(캐롤라인의 이야기) p. 363


엘리자는 넬라의 약방손님이다.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여자는 동틀 녘에 찾아온다고 했다." 동틀 녘에 찾아온 12살 소녀는 주인마님과 함께 그 일을 계획했다. 주인님을 독살하는 일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기에게 무언가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과 주인마님은 자기를 아낀다고 믿고 있는 순수하고 영민한 이 아이는 넬라의 약방에 새벽에 방문한다. 그리고 건네는 따뜻한 차 한잔, 대꾸 몇 마디에 넬라를 받아들인다. 넬라는 그런 엘리자의 진솔하고 어린 마음을 결국 모른 척하지 못한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20년 만에, 엄마가 날 달래듯 나도 한 아이를 달래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왜 이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다고. 엄마도 나도, 대체 왜 아이들의 여린 마음을 보호해 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걸까? 그래봤자 진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버릴 뿐인데. 진실이 도착해 문을 세 게 두드리기 전에 그 진실에 무감각해질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갈 뿐인데. p. 252


나는 어른이 되고 종종 나보다 어린아이들에게 어디까지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하게 될 때가 있다. 엘리자에게 어른들은 많은 것을 숨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엘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나도 그런 일들에 동의한다. 언젠가 받아들일 나이가 되었을 때 조금 더 마음이 자랐을 때 이야기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 언제까지일까? 넬라는 엘리자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숨기고 스스로 처리하려 하지만 결국 엘리자에게 목숨을 빚지게 된다.


약제사 조사에 대한 부담 때문만도, 제임스의 불륜 때문만도 아니었다. 좀 더 미묘한 또 다른 비밀, 제임스와 내가 수년동안 서로에게 숨겨왔던 비밀, 우리가 행복하긴 했지만 성취감을 느끼지는 못했다는 비밀이 진창 속이 뒤섞여 있었다. p. 344

최근에 배운 것이 있다면 비밀은 삶을 망쳐 놓는다는 것이다. p. 347


이 책의 원제는 The lost Apotbecary이다. 직역하지 않고 '넬라의 비밀약방'으로 제목을 정한 이유가 처음에는 조금 더 한국 정서에 맞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그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넬라에게는 치료약을 파는 약방과 독약을 파는 비밀약방 두 개의 약방이 있었다. 거기에서 나온 제목이기도 할 테다.


그리고 책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가 가지는 비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부분도 한국 제목과 연결 지어진다. 비밀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살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해서, 안 해서, 들어주지 않아서 비밀이 생길 수 있다. 책을 읽으며 비밀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비밀로 나까지 속이면 안 된다는 것. 비밀로 나를 속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나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삶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내가 나를 안다고 생각하며 나의 비밀을 묻어버린다. 그렇게 조금씩 어긋난 것들은 어느 날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마음을 깨어 다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찾는 일은 언제나 늦지 않다. 마치 캐롤라인처럼.


마지막으로 넬라가 살던 시대에 여자는 비밀 같은 존재였다는데에서 이 제목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방 뒤에 숨겨진 존재 같은 것.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조금씩 꿈틀대던 여자들의 마음과 꿈같은 것들. 그것이 독약으로 나타났다. 독약은 상대방을 무너뜨리면서 나의 일부도 무너뜨린다. 그럼에도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18세기 여자들을 넬라는 장부에 기록한다.


국립중앙 박물관의 합스부르크 600주년 전시회에서 나는 대형 태피스트리를 보았다. 족히 내 키의 1.7배는 되어 보이는 길이에 방하나를 다 덮고도 남을 듯한 넓이의 태피스트리는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곳에 한참을 앉아서 태피스트리를 보고 있었다. 명암 하나하나를 살린 그 그림을 보며 오래전에 읽었던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여인과 일각수'를 떠올렸다. 그림을 보고 씨줄과 날줄을 엮어 태피스트리를 완성해 가는 직조공들의 이야기가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그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이렇게나 큰 태피스트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큰 그림 크기 정도일 거라고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합스부르크전시회에 걸려있는 두 작품,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바울과 기적의 물고기 잡이의 설명을 들으면 라파엘로가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태피스트리를 만들었다고 나온다. 보고 있자면 라파엘로가 그림을 정말 잘 그린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스친다. 생동하는 표정의 사람들과 명암과 색채가 선명한 주변의 풍경이 이를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 그림을 보고 양모와 실크로 이렇게나 표현하기 위해 실에 색을 입히는 일부터 직조하는 일까지에 종사했던 수많은 비밀스러운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넬라의 비밀약방에는 두 가지 면에서 태피스트리와 비슷한 지점이 있었다. 첫째는, 태피스트리에서 조그맣게 실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듯 보이지만 각자의 history가 있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데서 그렇다. 또 하나는 작가 사라 페너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방식이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거나 악역이 있지 않은데도 손에 땀을 쥐고 읽게 하는 직조기술, 독자가 인물 하나하나를 이해하게 만드는 시선, 완벽하진 않지만 매력적인 주인공을 등장시키며 이야기는 끝까지 힘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이 처녀작이라니!!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은 그리고 영원히 미제였으면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