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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민 Aug 09. 2020

나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

1. 내 아버지 이야기


  내 아버지는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이다.

내 할아버지는 함흥에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 전문대 법학부를 다녔다. 할아버지는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그 하숙집을 하던 과부의 딸과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다. 하숙집 딸이었던 내 할머니는 당시에  경기고녀를 다닌 신여성이었다. 할아버지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에 취직을 해서 공무원이 되자 두 분은 결혼해서 함흥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렇게 두 분은 함흥에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는데 그만 6.25 전쟁이 발발하여 대한민국의 공무원이었던 할아버지는 먼저 서울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 내 아버지는 늘 할아버지를 원망하곤 했는데, 할아버지보다도 말단이었던 사람들도 이리저리 수를 써서 자기 가족들을 다  데리고 피난을 나왔는데 할아버지만 고지식하게 가족을 못 데리고 나오셨다는 것이다. 일단 공무원을 다 소집해서 학교에 모아 놓고 내일이면 서울로 떠나기로 한 바로  밤, 내 할머니는 당시 열네 살이던 큰아들, 바로 내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를 찾아온다. 그리고는 혹시나 어떻게 될지 모르니 큰 아들은 데리고 피난을 가라고 한다. 아버지 말마따나 고지식했던 우리 할아버지는 겨우 몇 달만 떨어져 있으면 되는데 왜 유난을 떨며 아이는 데려왔냐고 싫은 소리를 하셨지만 할머니는 막무가내로 아들을 맡기고 가셨다. 결국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서울로 피난을 왔고 그 뒤로  다들 알다시피 남북은 분단이 되었고 두 사람은 다시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 나중에 아버지가 할머니가 주신 짐을 풀어보니 그 속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결혼사진도 들어있었다고 하니  할머니는 이 피난이 어쩌면 오래 걸리리란 걸 직감하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서울 피난살이는 시작되었고 기약 없는 피난살이가 계속되자 결국 할아버지에게는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 내 아버지는 자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새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했고  그래서 할아버지가 새 장가를 든 이후로는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다행히 공부 머리가 있던 아버지는 서울대 치대에 합격한다. 치대를 졸업했으나  개업할 돈이 없던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으로 우리나라가 베트남에 파병을 하게 되자 군의관에 지원하여 베트남에 가게 된다.

그렇게 베트남에서 벌어 온 돈으로 조그만 병원을 개업하여 아버지는 그렇게 치과의사가 된다


2. 내 어머니 이야기


  울에서 5남 2녀의 둘째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깜찍한 외모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고등학교 서무과에 근무하던 외할아버지는 다정한 성격이었고 많은 형제들과 부모님에 둘러 쌓여 어머니는 부유하진 않지만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열한 살이 되던 해 6.25 전쟁이 일어났고 피난을 가느라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시 열여섯 살인 큰언니와 두 살 밑의 동생 이렇게 셋이서 대전에서 만나자고 가족들과 약속을 하고  피난을 떠난다.

피난 도중에 어느 마을에서 하루 묵어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 주둔한 미군들이 밤마다 '색시'를 찾으며 각 집을 돌아다니자 어머니와 이모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었는데 미군이 들이닥쳐 그 이불을 들춰내자 이모가 큰 소리로 "She is  my  younger sister"라고 외쳐 미군들이 웃으며 그 집을 떠났다고 한다. 큰 이모는 여든이 넘어서도 영어 공부를 계속하셨는데 이때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이리라. 우여곡절 끝에 머니는 결국 대전에서 가족들과 상봉하여 다시 온 가족이 모이게 되었는데 단 한 사람, 집안의 장남인 당시 열아홉 살이던 큰 오빠는 피난 가던  중 국군에 입대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어머니의 큰 오빠는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어느 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큰 아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결국 그로 인해 속병을 얻어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셨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고등학생이 된 엄마는 공부를 곧잘 하는 학생이었으나 여자는 고등학교만 나오면 된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등학교 졸업 후 은행에 취직을 하게 된다. 어머니는 늘 본인이 공부를 못해서 대학교에 못 간 것이 아니라 집안 형편이 안 좋아서 대학을 못 간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를 했지만 같은 집 딸이었던 큰 이모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나온 것을 보면 어머니 스스로 악착같은 면이 부족했던 것 같다. 어릴 때와 같이 곱상한 외모의 어머니는 곧 은행장의 비서가 되었고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었던 은행에서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며 살아간다.



3. 내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


 치과를 개업한  아버지는 치과와 집을 오가며 가족도 없이  단조로운 생활을 한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서른 중반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사는 아버지가 안쓰러워 주변에서 여자를 소개해 주기도 했지만 수줍음 많고 말주변도 없는 아버지는 쉽게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한 번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은행에 다니는 동네 후배를 소개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몇 번의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이분이 바로 내 어머니인데 몇 번을 만나도 별 반응이 없는 아버지가 어머니는 못내 답답했다고 한다. 진전이 없는 관계에 지친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만나서 헤어지자는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아버지와 만날 약속을 정했다. 약속 장소는 당시 동물원이었던 창경원. 어머니는 "아니 하마 이빨이라도 쑤시려고 하나. 왜 동물원에서 만나자고 하나" 의아했지만 일단 약속을 정했으니 창경원으로 나갔다. 창경원에서 말없이 동물들을 구경한 후 아버지는 "부부는 죽어서도 한 무덤에 묻히는 거"라며 나름대로 준비한 프러포즈를 한다. 어머니는 웬 프러포즈를 하며 죽는 이야기를 하나 짜증이 났지만 그 시절엔  노처녀인 서른둘,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며 아버지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그리하여 두 분은 결혼을 했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기르며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딸이 바로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나'이다.




4. 함경도 또순이와 서울깍쟁이 사이의 어딘가


함흥 출신의 아버지와 서울 출신의 어머니를 둔 나는 함경도 또순이일까 서울깍쟁일까.

나는 바란다. 내  핏속에 대대로 반골이었던 함경도 사람들의 뿌리 깊은 저항의식, 그리고 대의명분에 흔들리지 않고  실리를 추구하는 서울 사람들의 현실감각이 함께 흐르 있기를. 그래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핏줄로 태어난 존재임을, 내가 이 모든 이야기들의 총임을 기억하 잊지 않는 것이 를 나답게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나를 존중하며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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