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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한 Jul 18. 2024

검은 리본

서이초 사건을 기억하며

    며칠 전부터 무거운 비가 내린다. 몸도 마음도 축축 처지며 동시에 붕 뜨는 느낌이 드는 방학 주간. 언제나처럼 수업 자료를 검색하다가 검은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날이구나. 모두가 놀랐지만 동시에 누구도 놀라지 않았던 그날. 사라진 게 나였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날. 서이초 참사로부터 벌써 1년이 지났다.


    나는 서이초 사건을 보며 2019년의 가을을 떠올렸다. 생각지 못했던 9월 발령, 당시 살던 집으로부터 1시간 40분이 떨어진 첫 학교에서 벌어졌던 일을. 그저 교사가 앞에서 좋은 모범을 보이면 아이들도 엇나가지 않을 거라는 순진한 착각을 했던 초임 교사였던 내가 거기 있었다. 서슴지 않고 반복되던 성희롱과 욕설, 한 아이를 향한 집요한 따돌림, 항상 시끄러웠던 교실, 비웃는 표정. 10평 남짓한 그 좁은 교실에서 나는 철저하게 고립됐다. 아이들 앞에서 끝내 울음을 터뜨렸던 그날부터 나는 몇 번이고 차에 치여 죽는 상상을 했다. 한 해가 끝나고 갔던 워크숍에서 '정말 병가를 쓰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라고 말하자 '그럼 병가를 쓰지 그랬냐'는 심드렁한 교감의 말을 들으며 느꼈던 무력함과 상처. 


    작년 봄의 나도 거기에 있었다. 도저히 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영악함을 마주하고 느꼈던 공포와 패배감. 내일은 또 어떤 일로 나를 괴롭힐까 조마조마하며 몇 시간이고 뒤척이던 밤. 삶의 의미를 잃고 그냥 이 지난한 날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결국 댐처럼 터져 나온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던 그날. 죽는다면 그냥 유서에 걔의 이름과 욕을 써놓고 죽고 싶다고 느꼈던.


    가장 가슴 아픈 지점은 이런 생각을 한 것이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서이초와 관련된 기사가 쏟아지던 작년 여름, 교사들은 슬퍼하는 동시에 그동안 참아왔던 고통을 다시금 고백했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죽는다면 교실에서 죽어야지라고 생각했다'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사라져 버린 것은 누구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중은 충격을 받았지만 교사들은 놀라지 않았다. 연금, 방학, 퇴근 시간을 들이대며 교사의 고충을 비난하던 이들이 있었고, 교사는 끊임없이 그에 맞서 현장의 어려움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단편적으로 교사를 까내리던 그들과 교사를 죽게 한 사람은 과연 다른 사람일까.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이 터져 나온 한 해였다. 직업의 어려움을 토로하면 '일이라는 게 원래 다 힘든 것'이라며 일축하던 친정에서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시위가 진행되었고, 많은 교사들이 모여 교육의 현주소와 불합리함을 알리고자 하였다. 형태는 어찌 되었든 모두가 '나는 이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미의 작은 점이 되어 모인 것은 분명히 큰 의미가 있었다.


    그날로부터 1년,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는가. 교사의 과도한 업무에 박차를 가하는 '늘봄' 정책이 결국 학교로 들어오게 되었다. 교육과 관련된 예산은 오히려 감축되었다. 교육 과정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개정 교육과정이 현장에 혼란을 주었다. 교육부에서는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하겠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학교 폭력을 전담하는 교사에게 학교 폭력 매뉴얼을 들이밀며 훈수를 두는 비전문가가 있다.


    그렇게 많은 교사의 목소리, 논의가 있었다는 게 꿈만 같다. 서이초 1주기인 오늘 학교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사실 나는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교사들조차 잊어버리는 일을 사람들은 기억할까. 현장을 떠나는 교사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언제까지 이 지독한 이기주의와 매너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무기력하고 슬프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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