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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Jul 01. 2024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마른 나물 바람치기


이야기 하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

.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




김수영 시인의 시 중에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시가 주는 감동은 자신의 하찮음에 대한 연민과 반성입니다.

시를 통해 불쑥 내민 시인의 민낯이

구린내 나는 저의 똥보를 날카로운 송곳으로 쿡! 찌르는 듯합니다.

 

정작 저는 부끄러워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 쓰여서

말하지 못하고 우아하게 포장하는 일들이 허구하게 많습니다.


저도 언젠가 불의에 저항하지 못하고

옹졸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반성하며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 비판은 잘 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비판할 줄 모르는 무딘 양심에

예리한 날이 섰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야기 둘, 마른 나물 바람 치기



저희 집엔 냉장고가 세 대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냉장고가 얼마 전에 멈췄습니다.

제 수명을 다한 것이지요.

멈춰버린 냉장고는 쌀이나 마른 나물을 보관하는 엄마의 곳간 같았습니다.

일 년 내내 음식 재료들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었거든요.


아쉬운 마음이 들어 수리하려고 서비스 센터에 문의했더니

오래된 제품이라 부속을 구할 수 없는 냉장고라고 하더라고요.

그렇담 한 대를 더 사야 할까? 고민하다가

전기세도 줄일 겸 두 대의 냉장고만 써보기로 했습니다.


고장 난 냉장고에서 나온 물건들을 꺼내

두 대의 냉장고에 여기저기 쑤셔 넣었습니다.

마른 나물들은 여유 공간이 없어서 못 넣었고요.

냉장고에 넣지 않은 마른 나물을 보고 있자니

장마 전에 마른 나물을 햇볕에 바싹 말리시던 어머님 생전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머님께서 하시던 데로 나무 채반에 나물을 펼쳐놓고 말렸습니다.






이웃님들도 눅눅한 것들 있으신가요?

꺼내서 뽀송하게 말려보세요.

기분이 한결 상쾌해질 테니까요.

눅눅해진 생각까지 말릴 수 있다면 비단 위에 꽃을 더하는 일일 거예요.


작가의 부엌에서 소식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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