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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감수성에 대한 단상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by 김경희

문학적 감수성은 후천적으로 길러질 수 있을까? 단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다만 나는 감수성은 단순한 취향이나 감정의 예민함이 아니라, 사유의 깊이와 마음의 폭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노력에 따라 감수성은 어느 정도 길러질 수 있다는 말도 가능하다. 글을 쓰고, 세상을 관찰하며, 작은 풍경 하나에도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면 사유가 깊어지고, 세상을 조금 더 섬세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감수성의 깊이에는 한계가 있다.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감수성에는 끝이 있고, 끝 너머의 울림은 타고난 영역일 때가 많다. 누구나 꾸준히 노력하면 ‘2등급’ 정도의 섬세함에는 이를 수 있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1등급’의 감수성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선물일지도 모른다.


에세이처럼 논리와 흐름으로 글을 이어가는 글쓰기라면, 부족한 감수성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 하지만 시나 소설과 같이 마음을 울리는 문학에서는, 타고난 감수성이 없으면 사람의 심연을 건드리는 감동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글 속에 스며드는 진심과 미묘한 울림은 노력만으로는 완전히 닿을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학적 감수성은 노력과 타고남이 서로 얽힌 세계다. 노력은 마음을 열고 사유를 넓히며 관찰의 눈을 길러준다. 하지만 울림의 강도와 깊이는 타고난 감수성에 좌우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쓰며 끊임없이 마음을 다듬고, 세상의 깊이를 느끼며, 동시에 자신 안에 잠재한 감수성을 발견하고 믿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만나야 비로소 글이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갖게 된다.








나는 스스로 문학적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어쩌면 이런 결핍이 글로 이끄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오로지 마음과 생각을 풀어놓는 일이 전부였다. 독자를 배려하기보다 내 안의 감정을 펼쳐내는 데 온 마음을 쏟았으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글 쓰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는 앞말과 뒷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 논리와 흐름이 어긋나지 않는지 먼저 살피게 된다. 설득력 없는 문장은 독자의 마음에 가닿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동을 강요하기보다 글이 독자에게 닿을 수 있도록 다듬는다.


생각해 보면, 나의 글쓰기는 부족한 감수성을 억지로 채우려는 몸부림이 아니었다. 오히려 결핍 속에서 사유와 논리의 힘을 키워가는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이 나만의 문학적 감각을 만들어 주고 있다. 타고난 감수성이 모든 것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꾸준히 생각하고, 쓰고, 고쳐 쓰는 일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넓어진다.


남편과 함께 떠나는 여행에서 우리는 늘 문학관을 먼저 찾는다. 윤동주문학관, 영인문학박물관, 김유정문학촌, 신동엽문학관, 한용운문학관, 혼불문학관, 석정문학관, 아리랑문학관, 이육사문학관, 권정생동화마을, 청마문학관, 박경리문학관, 시문학파기념관, 나태주 풀꽃문학관... 이름만으로도 문학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공간들.


감수성이 뛰어난 작가들의 일생과 작품을 마주할 때면 그들의 세계가 부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타고난 감수성 자체가 아니라, 문학을 향한 그들의 지독한 열정과 묵묵한 인내,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다. 이런 힘이 있었기에 그들은 끝내 자신만의 문학을 완성할 수 있었다.


결국 글쓰기는 감수성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그저 쓰고자 하는 마음과 계속 나아가려는 끈기가 문학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다.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펜을 드는 순간 글 쓰는 사람은 서서히 자라난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허리가 굵어지고 키가 자라는 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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