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겸손하고 수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공간을 덧없이 소비하는 일들
장소가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파리의 에펠탑이 그 예다. 그곳을 갔다는 증거 외로 에펠탑을 방문하는 이유가 있을까. 그곳에 적힌 공사 내역이나 당시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언급을 모아 조각이불 갖듯 하겠지만 에펠탑의 쓰임새는 그 정도에 그치고 말지 않나 싶다. 내가 여행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미지로서의 에펠탑.
‘화성’이라는 역사 유물을 가진 수원에 산 지 20여 년이 넘었다. 딱히 수원의 역사에 반해서 이곳에 정착한 것은 아니다. 살던 곳의 집값이 너무 올라 더 이상 전세살이를 하지 않겠다며 눌러 않았다. 그처럼 시작은 분노에 찬 우연이었다. 지금은 고향 같기도 하고, 가진 유무형 재산 목록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을 보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른바 수원 사람이 다 되었다.
에펠팝처럼 소비되진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원에 늘 부여하고 살았다. 인스타그램을 만족시키는 수준에 이르면 도시 공간은 막장으로 흘러갈 여지가 많다. 이미지로 소비되는 공간, 사진 찍히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 그 안에서 공간은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심지어 그가 지녔던 조그마한 기억조차 뿜어내지 못한다. 그냥 예뻐서 찰깍 소리에 담아두고 싶은 소품에 그치고 많다. 하지만 예뻤던 모습도 늘 가변적이라 싫증을 부르고 다른 예쁜이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수원 행궁동의 젠트리피케이션
수원 화성에 젊은이들이 핫플이라며, 혹은 행리단이라며 급속히 인구수를 늘린 지 한 3-4년 되었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이 급속히 이뤄졌다. 들리는 소문으로 카페 류의 점포가 백 여개 늘어났단다. 오를 수 있는 모든 지붕은 루프탑 카페가 되었다. 수리 가능한 대부분의 가옥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해 새로운 취향들에 맞춘다. 모두들 예뻐지려고 야단이다. 이미지를 가장 적극적으로 소비한다는 멜로드라마 제작도 수원 화성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선재 업고......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공방이 많이 사라졌다. 애초 화성 안에 있던 행궁동을 살리겠다는 의지로 시작되던 자리는 이젠 먹고 마시는 가게로 대부분 변신했다. 역사나 과거는 그 가게들의 소품으로 그칠 운명이다. 루프탑에서 성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기와지붕의 집 안에서 피자를 한 입 물고 바깥 고풍스러운 정원을 바라보는 일이 일상화된다. 그 이상의 의미 맥락을 넘기가 쉽지 않다. 화성에서 지불할 화폐에 맞먹는 즐거움과 입맛과 눈요기를 얻는다면 그걸로 수원 방문은 성공이다.
더 예쁜 젠트리피케이션이 벌어지는 곳이 딴 곳에 생기면 화성으로 왔던 발걸음들은 방향을 바꾸게 마련이다. 압구정에서 청담동으로 경리단길로 가로수길..... 공간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인구들이 거쳐가는 곳은 쑥대밭이 된다는 평가를 나의 몸은 해낸다. 수원을 살면서 그 결과를 미리 두려워한다. 그래서 수원으로 초대한 누구에게든, 수원 화성에서 만다는 누구든 ‘모에스럽게’ 걷지 말기를 서슴지 않고 당부한다. 수원의 역사를 꿰차라는 말을 하잔 뜻은 아니다. 지금 왜 루프탑이 이렇게 많아졌는지, 100 여 개의 카페류의 가게들은 과연 그 사업을 지속할 수 있을지, 이미지 소비 외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를 한 번 씩만 떠올리길 주문한다.
어두운 골목길에 도전한 파스타 하우스
젠트리피케이션 모두에게 늘 우려의 눈초리를 보내진 않으려 애쓴다. 소박하고, 선한 의도를 보여주는 도심의 변환에 대해선 박수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원주민들이 도대체 생각지 못했을 공간 활용을 보면 실제 건축 주인공을 만나 엄지 척을 보낸다. 자리한 공간에 제 몸같이 착 달라붙는 사업을 벌이는 업주를 만나면 감사의 말도 전한다.
행궁동 못 미치는 북수동을 잠깐 걷다가 슬럼처럼 버려졌던 공간에 수줍은 듯 자리 잡은 파스타 집을 만났다. 북수동 골목길에는 과거 독신 생활하는 하층 근로자를 위한 국밥집이나 선술집이 많았었다. 수원천 건너 편의 여러 학교 학생들의 등하굣길임에도 유흥 주점이 많다는 걱정을 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걱정의 골목에 이탈리안 식당 혹은 파스타 하우스라니. 거기에도 근처에 카페가 몇 개 들어섰고, 요구르트 카페, 베트남 국숫집이 줄 지어 들어서고 있긴 했었다. 파스타 하우스는 북수동 전체에서도 그늘진 공간이라 생각했던 곳에 수줍지만 용감하게 들어서 있었다. 식당 자리로선 주인의 판단 미스라 생각할 그런 곳이었다.
밝혔듯이 나는 그런 모험에 더 관심이 많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보다는 그를 거슬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의지에 늘 박수를 보낸다. 더 이야기를 만들려 파스타 하우스의 문을 밀었다. 바깥에서 본 것보다 훨씬 눈이 시원해질 만큼 넉넉한 공간이었다. 편한 맘으로 맛을 볼 수 있겠다는 느낌을 주었다. 별다르게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하진 않았다. 깔끔하고 한가하다는 느낌 공간 이상은 아니었다. 넉넉했지만 수수한 그런 느낌의 공간이었다.
천천히 잘 먹고 잘 비웠다
샐러드 등의 스타터, 메인 접시인 파스타나 리조토 혹은 라쟈냐 등을 메뉴판에 담고 있었다. 잔으로 혹은 병으로 파는 와인을 그 아래에 소개하고 있다. 메뉴판 한쪽엔 식전 빵과 조리된 버터를 제공한다는 정보가 다소곳하게 적혀 있다. 늘 적게 먹기를 즐기는 편이라 메뉴판 사진으로 보이는 온갖 음식들도 그 양만으로 나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요란하지 않아 좋았다.
식전 빵은 막 구운 듯 온기와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후 차례차례 온 샐러드의 내용 그리고 그 위의 드레싱도 평범하고 수수해서 파스타 하우스 전체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전해진 파스타와 리조트도 연한 맛으로 입 안을 즐겁게 했다. 면을 직접 만든다는 점을 메뉴판에 강조했던 만큼 면의 부드러움이 확연했다. 와인 맛을 잘 알았더라면 그에 맞는 부드러운 와인을 주문해 그 기쁨을 배가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런 재주가 없어 맛을 즐기는 일은 그쯤에서 마감했다.
주방에서 일하는 분들이 모두 젊었다.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제 일을 하느라 모두 분주했다. 언제든 수수한 맛을 내기 위해 더 많이 끓이고, 굽고, 휘젓고, 주무르는 것일까 짐작했다. 음식을 남기지 않을 만큼 적당히 잘 담아주는 것도 재주다. 식사 후 모든 그릇이 비워있을 때 즐거움은 배가된다. 남긴 만큼 미안해지는 것이 식후의 테이블에 대한 감상이다. 천천히 잘 먹었고, 잘 비웠다. 모든 것이 원만했고, 수수했다. 심지어 가격까지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터이니 혹 이 소개 글을 읽은 분에겐 과제를 드린다. 선술집이 넘쳐나던 골목 가장 그림자 짙은 곳에 파스타 하우스가 들어선 까닭과 구도심이 지닌 운명의 짐이 어떻게 어울리는 것일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거리에 조명조차 없어 희망의 빛이 조금이라도 새어 나오지 않는 골목이었다. 거기에 젊음이 오고 간다. 수줍지만 살고자 하는 기운이 넘친다. 또 다른 질문이다. 지속될 수 있을까. Eatty Beat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