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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BEL Aug 06. 2020

[영화 리뷰] 죽은 시인의 사회 (1)

‘자유’를 상징하는 시

영화는 제목답게 시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내가 느끼기에 이 영화에서 시는 크게 두 가지를 상징한다.

리뷰를 쓰다 보니 분량이 꽤 길어져서 이번 글에선 그중 하나만을 다루려고 한다.

오늘 다룰 것은 ‘자유’를 상징하는 의미로써의 시다.

동료 선생이 키팅의 교수법을 비꼴 때, 그는 자신의 교육목적이 학생들을 예술가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색가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분명 문학을 그리고 시를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과 자유로운 사색가란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그리고 자유로운 사색가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

우리는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하여 먼저 자유가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자유란 것은 일반적으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뉜다.

여기서 소극적 자유란 쉽게 말해 ‘~로부터의 자유’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의 강제나 방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이 영화에서 ‘권위로부터의 자유’로 구체화되는데, 키팅은 이를 학생들에게 일깨워주고자 다양한 시도를 한다.

난 그중 키팅이 학생들에게 프리처드 박사가 쓴 ‘시의 이해’라는 책의 서문을 읽게 한 뒤

그것을 쓰레기라고 평가하며 찢어버리라고 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꽤 다층적이다.

먼저 보수적인 학교의 분위기 상, 학생들에겐 책을 찢는다는 행위 자체가 꽤 충격일 것이다.

심지어 그 책이 에반스 프리처드 박사라는 권위자가 저술했다는 점

그리고 찢어 버리라는 그 페이지가 그런 권위자가 만든 이른바 시의 위대함을 판단하는 공식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건 단순히 책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강력한 권위에 대한 반항

즉,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찢는 장면은 꽤 재밌는 요소가 많다.

(좌) 서문을 찢자 나오는 ‘poetry’, (우) 이와 대비되는 캐머런


먼저 그들이 서문을 찢고 나서 나타나는 페이지에 ‘Poetry’라고 크게 박혀있단 점이다.

카메라는 이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하여 보여주는데 이는 시의 우열을 나누고 평가하는 사고를 벗어남으로써 학생들이 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 같다.

또 장면을 잘 관찰해보면 캐머런은 이 페이지를 대표적인 측정 도구인 자를 사용하여 뜯는데 함께 뜯겨 나간 건지 이 때는 또 ‘poetry’가 박힌 페이지가 보이지 않는다.

뒤에서도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 영화에서 시가 상징하는 것이 자유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연출은 그가 결국 이 자유의 가치를 내면화하지 못할 거란 걸 암시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그의 배신을 예견하는 연출은 꽤 여럿이다.

예를 들어 캐머런이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단 한 번도 시를 낭독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첫 장면의 개학식에서 이 사 원칙 중 ‘전통’을 들고 가장 선두에서 들어오는 인물이 바로 캐머런이란 사실 등이 있다.

사 원칙이 새겨진 깃발 중  ‘tradition’을 들고 선두에선 캐머런

영화에서 이 전통이란 것이 사실상 불합리한 권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 장면 역시 캐머런이 권위에 반항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다는 결말에 대한 시그널로 이해했다.

이 영화는 이런 디테일한 연출들이 많은 편인데 나 역시 관객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얘기가 조금 샜는데 이번엔 적극적 자유에 대해서 알아보자.

적극적 자유란 ‘~를 향한 자유’ 다시 말해, 자율적인 결정을 바탕으로 개인이 스스로의 주인이 됨으로써 성립하는 자유를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가 모두 충족될 때 비로소 실현되는데 사실 이 두 자유는 서로 독립된 관계가 아니고 끊임없이 서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영향을 준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생긴 개인적 의견을 첨언하자면 나는 소극적 자유가 적극적 자유의 필요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보겠다.

이 영화에서 적극적 자유란 ‘꿈을 향한 자유’로 나타나는데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건 역시 닐의 이야기다.

닐은 키팅 교수의 수업에 크게 감명받아 주도적으로 죽은 시인의 사회 모임을 재결성하고
나아가 배우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연극 오디션을 봐서 배역까지 따낸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키팅이 학생들에게 깨우쳐 주고자 한, 이른바 카르페디엠으로 상징되는 자유에 대한 닐의 열망을 느끼게 해 주지만 그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건너뛴다.

바로 아버지로 상징되는 불합리한 권위에 맞서지 않고 끊임없이 회피하기만 하는 것이다.

처음 오디션을 봤을 때부터 배역을 따낸 순간, 공연 하루 전날 아버지와 만났던 순간 그리고 생을 마감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자신의 열정과 꿈을 설명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슬픈 결말이 결국 아버지의 불합리한 권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해서 비롯된 것
즉, 소극적 자유가 실현되지 못해서 일어난 참극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권위에 대한 극복이 반드시 그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권위에 직접 맞서는 경험을 통해 그 개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권위의 그림자를 떨쳐내는 것이다.

공연 전 날 닐과의 상담에서 키팅은 그에게 넌 지금 아버지의 충실한 아들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라며 아버지에게 연기에 대한 너의 열정과 생각을 설명하라고 말한다.

이때 닐과의 대화를 보면 알겠지만 키팅 역시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닐에게 용기를 북돋은 건 스스로의 의지를 설명함을 통해 닐이 진정한 자유
즉,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모두 실현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닐은 마지막 순간까지 맞서길 피했고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글의 서문에서 던진 질문에 답할 때가 되었다.

키팅은 시를 가르침으로써 학생들이 자유로운 사색가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이 시라는 것은 결국 자유를 상징하며, 그가 말한 자유로운 사색가란 이러한 자유의 가치를 체화시켜 거듭난 독립된 인격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키팅은 수업에서 학교, 교장 그리고 닐의 부모 등 작중에서 학생들을 억압하는 이들이 소위 제대로 된 진로라고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의학, 법률, 경제 등을 그저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 다시 말해 욕구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라 설명한다.

그리고 키팅은 시, 미, 낭만 그리고 사랑이 진정한 삶의 목적이라 말하며 자유시의 대가
휘트먼의 시를 낭독한 뒤 수업을 마무리한다.

자유의 가치를 복습하는 차원에서 나 역시 휘트먼의 시로 이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영화의 내용을 떠올리며 독자분들 역시 찬찬히 읽어보시길 바란다.

- Oh, me! Oh, life! -

오, 나여! 오, 삶이여!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의문

믿음 없는 자들의 행렬 어리석은 자들이 넘쳐나는 도시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오, 나여! 오, 삶이여!

대답은 한 가지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

삶과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그리고 이 수업에서 키팅이 던진 마지막 질문

‘여러분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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