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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국진 May 05. 2021

엄마의 카드

<월간에세이 청탁글-2021년 5월호>

저의 브런치를 보시고 창간34주년이 된 <월간에세이>에서 이달의 에세이 원고청탁을 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능피디로 일하며 느낀 아이돌에 관한 저의 시선입니다.

모두가 공감해주시길 바랍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한 친구와 얼마 전 회사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고등학교 친구였던 그는

어느덧 과장이 되어 나에게 밥과 커피를 법인카드로 당당하게 샀다. “너는 피디니까 아이돌도

많이 보고 좋겠다!” “우리 여직원들이 KBS 앞에서 밥 먹는 걸 제일 좋아해, 지나가는 연예인을 볼 수 있으니까” 중후한 멋이 나려고 하는 친구는 소년처럼 나에게 말했다.

“처음엔 나도 신기했는데 조금 지나니 똑같아”


말 그대로 똑같다. 예능피디로 일한 지 15년이 지나니 나의 눈에 가수는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똑같은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소위 잘 나가는 PD라 하면 아이돌 그룹과 멤버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우고

또 그런 가수들과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주류에 끼고 싶은 마음에 나도 아이돌과 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제작하려고 했는데

참여한 가수들은 한류스타가 되어버렸고 어째 나는 점점 감이 떨어지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가는

새드 무비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말하기 쉽고 찾아보기 쉬운 화려한 이 연예계는 사실 지금의 나의 처지보다

더 슬픈 뒷이야기가 많다.


<빛나는 무대 위에 서는 빚쟁이들> <프로의 행동을 강요받는 중학생들> <핸드폰도 없는 원시인들>
이런 문구들이 내가 예능PD로 생활하며 바라보게 된 K팝스타 아이돌의 다른 모습이다.

<아이돌 드라마 공작단>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며 장시간 출연한 아이돌들과

짬짬이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너는 친구가 있니?”

단순한 질문이 생각났다.

“아니요 멤버들이 전부에요!”


초등학교, 중학교부터 연습생 생활을 하며 데뷔라는 목표

하나만을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든 그들은 학교보다 연습실이 편했다.

오히려 학교에서는 연예인처럼 바라보는 또래들의 시선 때문에 선입견이 생겨

더 친해질 수 없다고도 했다.

“정산은 받았니?”

“아니요, 갚을 빚이 더 많아요!”

친구도 없고 돈도 없는 이 친구가 가장 크게 고민하는 건 따로 있었다.


사복 패션을 위해 <엄마의 카드>를 받아 옷을 수시로 사야 하는 게 너무 힘들단다.

팬미팅 때 만난 팬들이, 혹은 공항출국 사진기사의 댓글로 사복 패션테러리스트라 놀림 받는

그녀는 소위 엄카로 명품 옷을 사 입고 나서야 팬들의 칭찬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화려한 조명과 수 많은 팬 들에게 둘러쌓인 그들의 진짜 고민은

돈이 없어 부모님께 손을 벌린다는 사실이다.

여느 자식과 마찬가지로 성공해서 집도 차도 사드리고 싶은데

돈이 없어 예쁜 옷을 살 수 없는 이들은 일부 팬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있다.


시청자와 아티스트 사이에 접점이 되는 방송을 제작하는 직업을 가진 나는

솔직하고 끔찍한 이들의 얘기를 듣게 된 순간부터 점점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 보게 되었다.

머리가 크고 군 전역을 한 순간부터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

취직할 때까지 엄마의 카드에 손을 대지 않았던 나인데

이 친구들은 가수라는 신분 때문에 어디서 아르바이트도 할 수가 없다.

또래 친구가 첫 직장을 구했다고 연락이 와도 일을 핑계로 나가지도 않는단다. 스케줄도 없는데 말이다.

돈도 많은데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유년시절 무엇이든 다 해주던 엄마와 엄마의 카드는

시간이 지나면 열배 백배로 갚고 싶은 한도 무제한의 사랑이었지만

지금은 서른이 다 되도록 원금도 못 갚아 가슴 아파하는 불효자의 상징이다.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3분30초가 끝나면 남은 시간은 숙소에서 꼼짝을 못하는 제약이 많은 시간들 뿐이다.

그 와중에 의욕은 충만하고 체력도 좋아 인내의 시간도 잘 견딘다.


아이돌의 진짜 고민을 알고도 나조차 누구에게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나도 그리고 너도 미워진다.

세상살이라는 것이 결국 알고도 모른 척 속아 넘어가는 대충대충의 연극인 것인가?

연예인을 자주 봐서 좋겠다는 나의 친구와 같은, 아이돌에 대한 무조건적인 바람, 상처주는 말들...

그들의 단편적인 면만을 보고 내뱉는 맹목적인 요구와 기대는 내려놓고

그들을... 어딘가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 직업인으로 대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더 많은 K팝 가수들이 엄마에게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카드를 직접 만들어 드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엄마의 카드>는 엄마만 쓰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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