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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래이 Oct 06. 2021

틀림의 시학, 레이첼 주커 (2)

The Poetics of Wrongness

레이첼 주커의 스타일


주커는 2015년 12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배글리 라이트 강연 시리즈(Bagley Wright Lecture Series)의 강연자로 전국을 돌며 시와 고백, 시와 사진, 윤리학 등을 아우르는 강연을 진행했다. 출간을 앞둔 그 강연 선집이 <틀림의 시학> 이며 오늘 우리가 잠시 엿볼 그녀의 시학이다. 

모든 시인이 시학을 쓰지는 않는다. 자신만의 시학이 있다고 해도, 글로써 그 시학을 정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도 않지만 쓰고 나면 자신의 시학을 취소하고 싶은 욕구가 들 게 분명하다. 시의 본질과 작법을 논하는 목소리에 확신이 깊을수록 그 시학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불신 역시 깊어진다. 한 시인이 시학을 쓰는 일은 마치 신부님에게 기도의 본질과 내용, 형식, 기도가 어떻게 실현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기대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도가 이루어질지라도 기도의 속성을 알아내기 불가능하듯, 시를 쓴다고 해서 하나의 시학을 세우는 일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힘든 일이기에 주커 역시 어느 밤, 3년 전 제안 받은 강연을 강연 내용-시학-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 아들, 열여섯, 열넷, 여덟 살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이 강연과 "관련이 있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먼저 주커는 이전에 강연 경험이 없음을 밝히며 강연이 "사람들에게 내 생각이나 아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밝힌다. 어쩌면 강연이라는 건 강연자인 자신이 사람들에게 "고려해야 할 것"을 말하는 일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역시 자신의 스타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스타일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거나 아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생각해야할 어떤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면, 그녀는 어떤 방식의 강연을 하고 싶은 것일까. 


시인에 대한 현재 나의 정의는 이렇다. "나는 틀렸고 당신도 틀렸고,그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나는 곧 시인이다."
시인은 옳지 못한 세상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설사 그런 행동이 그가 틀렸고, 추하고 그것에 연루돼 있음을 증명한다고 해도 말이다.


시인에 대한 그녀의 정의는 흥미롭다. 스스로 틀렸다고 인정하고, 상대 역시 틀렸다고,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가 곧 시인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녀의 시학은 시를 둘러싼 어떤 '옳은 것' '맞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틀림의 시학>은 시를 둘러싼 오해와 그릇된 생각에서 출발한다. 시에 대한 그녀의 견해-<틀림의 시학>-와 상반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틀림의 시학>에 반하는 여섯 개의 시적 교리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틀림의 시학>에 반하는 6개의 시적 교리


1. 시는 아름다워야 한다

2. 시는 비스듬해야 한다

3. 시는 짧아야 한다

4. 시는 영원해야 한다

5. 시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6. 시는 신앙심에 가깝다

_<틀림의 시학>에 반하는 6개의 시적 교리


<틀림의 시학>을 거스르는 여섯 개의 시적교리들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시'에 대해 우리가 막연히 품고 있는 기대들, 오해들, 통념들이 여섯 개 안에 잘 담겨 있다.

첫 번째, "시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시가 아름다움, 미를 노래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그녀의 주장을 담고 있다. 두 번째, "시는 비스듬해야 한다"에서 이 '기울어짐'은 시가 창의성과 독자에 대한 고려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변질된 진실이라는 주장을 다룬다. 세 번째 "시는 짧아야 한다"는 흔하게 퍼져 있는 시에 대한 오해이다. 

네 번째 "시는 영원해야 한다"는 시가 시간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오랜 시간 살아남아야 한다는 통념에 반하는 주장을 담고 있다. 다섯 번째, "시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역시 우리가 시인, 시에 대해 품고 있는 기대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 교리는 "시는 신앙심에 가깝다"이다.



시는 짧아야 한다!? 


세 번째, "시는 짧아야 한다" 이는 어린시절 내가 품었던 막연한 인상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주커는 시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그릇된' 인식에서 부터 출발해서 자신의 시학을 펼친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새겨진 시들, <이달의 시>에 꼽힌 시들, 백일장 대상의 시들, <올해 최고의 시들> 좋은 시의 예로 뽑혀 전시된 시들은 대체로 짧다. 그럼 짧은 시들이 좋은 시일까. 아니면 좋은 시 중에 짧은 시들이 많은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짧게 쓰는 것이 길게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도 말한다. 

주커는 "시는 짧아야 한다"는 교리에 반대한다. W.S. 머윈과 마가렛 엣우드, 마리안 무어의 짧은 명시를 소개하며 그녀 역시 짧지만 강력한 시적효과를 주는 시들을 칭송한다. 하지만 그녀는 "달성해야할 목표로써의 간결성에 대해 거부"한다.


부모 새와 같이 시인은 말을 씹어서 나의 열린 부리에 내뱉거나 가는 바늘을 들고 와서 내 혈관 속으로 고통 없이 어떤 것의 정수를 주입할 것을 약속한다. 내곁에 오지는 말길, 아름다움과 완벽의 서정시인이여. 차라리 섬유질이 그대로 있는 음식을 내게 다오....틀림의 시학은 진짜 음식을 더 좋아한다. 설사 그것이 나를 토하게 할지라도, 씹고 또 씹고, 또 씹어야만 한다 해도 말이다. 


물론 그녀는 길기만 한 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시의 길이가 그 시의 뛰어남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주커는 긴 시에는 "종종 <틀림의 시학>을 만족시키는, 시간의 존재에 관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시는 "독자와 작가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만남의 장소"이다. 쓰여진 시를 독자가 단독으로 읽고 소유하는 짧은 말의 모음이 아니다. 호흡이 긴 시는 어떤 점에서 독자가 그 시를 읽는 순간 그 시를 쓰는 순간의 작가와 만나도록 해준다. 주커는 한 시 안에 담기는 시간성을 중시한다. 간결한 세련된 시에서 가끔 느끼는, 우리를 오그라들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투박하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시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감성이 있다. 주커가 말한 "섬유질"의 그것.


시의 책무는 기반을 약화시키고, 반박하고, 응수하고, 다시 보고, 교란하는 것이다. 다정하게 또는 공격적으로 당신이 틀렸다고, 세상이 엉망이라고, 우리의 이해와 표현방식이 의문스럽고, 비난과 감시는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말하는 것이다.....딸로서 또 어머니로서 나는 알게 되었다. 부모의 잘못을 알게 되고 또 내가 얼마만큼 잘못했는지 듣게 되는 일이 애착과 분리, 개성과 사랑의 복잡한 행동이라는 것을 말이다.


주커는 사랑의 반대는 무시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시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녀 역시 시를 둘러싼 잘못된 관념들을 끌어모아 자신만의 시학, <틀림의 시학>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나의 이 기대 역시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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