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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 Oct 21. 2020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런 날이 있다.


어떤 계기나 이유가 있어서 기운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힘이 소진된 날. 여느 날처럼 잠으로 기분과 기운 모두를 리셋시키고 싶어 침대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도 잘 수 없는 날. 잠에 들 시기를 놓쳐 오히려 각성된 상태로 다음날을 걱정하며 잠에 들지 못하는 날처럼, "지금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선 잠 뿐이야." 라고 되뇌어보지만 오히려 그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날. 그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잠 못드는 날들의 패턴들도 사뭇 비슷하다. 내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선 당장 잠에 드는 것이 우선이 된 나에겐 잠이 어려워진다. 평상시에는 침대에 눕기만 하면 다음 날을 맞이하는게 익숙해 잠을 설치는 시간은 버겁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확장된다. 머리 한 켠에 넣어두었던 고민들이 불쑥 튀어나와 말을 건다. 외면한다. 핸드폰을 뒤적여 자주 듣던 라디오나 유튜브를 틀고 의식의 흐름을 맡겨본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걱정 앞에서 들리지 않는다. 이내 핸드폰을 다시 켜 평상시 관심을 갖지 않던 주제 혹은 어려운 주제에 관한 내용을 재생시키고, 20분 뒤 꺼짐 설정을 해둔 뒤 다짐한다. 잘 수 있어. 


실패했다. 말소리가 끊기고 정적이 찾아왔다. 고요함 속 기존 걱정들이 다시 피어오른다. 그 중 죽음에 대한 걱정은 적막한 밤에, 조용히 홀로 남은 시간에 찾아오는 친구다. 별을 보며 고민했던 막연했던 죽음은 어느새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죽음으로 다가왔다. 긴 치료 끝에 잠시 얻은 휴전이라 그럴까. 때로는 갈비뼈, 어떤 때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통증으로 몸 속에 내전이 다시 시작한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가 떠나질 않는다. 내가 앞으로도 함께 짊어지고 갈 새로운 강박 혹은 공포이다. 쉽게 이기긴 어렵겠지만.


나의 생각 꼬리물기 끝엔 항상 형이 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공감능력이 좋다며 칭찬해주고, 꽤나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주었다. 그러면서 꽤나 어른이 된 것마냥 사람들의 생각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알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시절 투병하던 형의 마음도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했었지만 지나고보면 터무니없고 무지했다. 아는 것은 없었지만 안다고 생각했고, 공감도 못했으나 그 슬픔과 고통을 함께 끌어안은 것처럼 행동했다. 내 인생에 돌아가고 싶은 순간으로 꼽지 않을까. 돌아간다해도 그 마음은 부족할테니.


부족한 나에게 큰 가르침을 준 책 신형철 작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실린 내용을 공유하고자한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고통의 크기나 형태, 모양은 중요치 않다. 우리는 모두 다르니까. 각기 다른 이유로 다른 방식으로 슬퍼하고 아파한다. 그러나 글처럼 나의 슬픔뿐만 아니라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완벽하게 이해받고 위로받기 힘든걸 알면서도, 온전치 못한 우리이기에 주변에 손을 내밀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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