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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 Aug 31. 2022

『우리는 사랑일까』를 읽고

「앨리스는 배급자의 이름이 올라가고 필름에 아무것도 찍히지 않아 시커먼 화면이 나올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영화에서 현실로 귀환해야 하는 아픔을 미루고자 함이었다. 」


 영화가 끝난 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 쿠키영상이 있는 영화가 아니고선 대부분의 관객들은 본인의 소지품을 챙기고 핸드폰을 켜며 자리를 나선다. 나의 여자친구는 앨리스처럼 끝까지 자리에 앉아있는다. 알랭 드 보통처럼 세심하지 못한 나는 이 구절을 보고서야 그 의미를 물어보았지만.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에 이어서 이러한 섬세한 작가의 표현은 나의 연애, 생각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앨리스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아무 기대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비관적인 생각과 예상되는 실패를 피하고자 하는 희망의 관계는 악명이 높다.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사가 어긋날 거라는 생각에 계속 집착하면, 결국 일이 제대로 풀렸다.」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인 나로선 아주 공감하는 표현이다. 이번엔 좋은 결과가 있을거야라는 기대감은 더 큰 실망으로 돌아오기 쉬웠고, 오히려 정말 최악을 고려했을 경우엔 그보다는 좋은 소식을 들었다. 매사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나지만, 영화를 보거나 맛집을 갈 경우에도 기대가 크면 평가가 박하기 쉬웠다. 이러한 경험들은 나로 하여금 최악을 생각하게 하고 대비하게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덕에, 호텔과 매혹적인 연인은 풍부한 상상력의 방아쇠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이 광고를 보는 사람들이 침구의 색상이나 샤워기의 수압을 알 수 없듯이, 앨리스도 아직 상대방 성격의 지형도를 그릴 만큼 다양한 분위기나 시간대에 걸쳐 고루 에릭을 경험하지 않았다.」


 처음 만나 알아가는 연인에 대한 표현 중 "지형도", 확 와닿는 표현이었다. 앨리스는 에릭의 파티에서 능글 맞지만 여유 있는 모습을 보고 만났지만, 아직 그의 다른 모습들을 모를 때의 표현이었다. 소개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본인의 지형도 중 랜드마크 혹은 좋은 장소를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때론 나의 뒷골목/낙후된 지역들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겠지만 말이다. 상대방의 다양한 모습을 그리기 어려워서 소개팅으로 만나는 것은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만나면서 알아갈수도 있었겠지만, 그만큼 용기있진 못했나보다. 


 지금의 여자친구와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함께 같은 모임에서 만나서 나 아닌 누군가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엿볼 수도 있었고 꽤나 다양한 상황과 시간을 보냈기에 그녀의 지형도를 대부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며 (직접 보진 못했으나) 여러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또다른 지형도를 그려가는 중이다. 


 「빨래 건조기에 비유할 수 있는 철학적인 관점이 있었다. 건조기의 특징은 내부의 드럼이 일정한 시간 동안 회전되는 데 있다. 옷을 일정량 넣으면 드럼이 회전하는 데 따라 그 안에 든 옷이 빙빙 돌았다. 어느 순간 강화 유리창으로 청바지가 보이고, 또 양말이 보이고, 셔츠가 나타나고 행주가 보인다. 안에 든 옷이 항상 다 보이지는 않지만, 드럼이 회전하면서 규칙적인 간격으로 그 모습을 보였다. 청바지가 행복을 나타낸다면 양말은 의기양양한 기분, 셔츠는 권태로움, 행주는 울부짖는 비참함을 나타낸다. 건조 과정은 삶의 과정과 견줄 수 있어서, 한 번 왔던 것이 도리 없이 다시 오면서 인생살이는 반복이고 존재는 돌고 돈다는 것을 암시했다.」


 같은 건조기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우리집에선 물론 종류를 맞춰 세탁기를 돌려서 이런 경우는 없지만, 각각의 세탁물이 표현하고 있는 감정마저 알맞다. 양말의 의기양양함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출근 준비하며 입는 셔츠에는 권태로움을, 약속을 준비하며 입는 청바지에는 행복을, 집안일을 하며 힘든 일들을 도맡아하는 행조에는 울부짖는 비참함을 담았다. 우리들의 삶도 여러 감정들이 돌고 돌겠지만, 청바지가 보이는 날이 많기를.


 「사랑의 권력은 아무것도 주지 않은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상대가 당신과 같이 있으면 정말 편안하다고 말해도, 대꾸도 없이 TV 프로그램으로 화제를 바꿀 수 있는 쪽에 힘이 있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아무 의도도 없고,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사랑의 목표는 소통과 이해이기 때문에, 화제를 바꿔서 대화를 막거나 두 시간 후에나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힘없고 더 의존적이고 바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힘들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다.」


 항상 알콩달콩하며 행복할 것 같은 사랑에서 긴장의 순간을 표현했다. 앨리스가 남자친구인 에릭을 오래도록 기다리며 보고싶었다고 귀에 속삭이지만, 에릭은 제임스 본드의 영화 TV 방영시간에 대해서 물을 뿐 이었다. 이 관계를 더 유지해가고 싶은 앨리스는 본인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 대신 그의 질문에 대답해준다. 언제든지 쉽게 깨질 수 있는 연인 관계의 상태이다. "나의 아무거나 다 좋고 너가 좋은 것을 하면 좋다." 속에 이런 마음은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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