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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나라 Apr 12. 2021

여자로서의 나를 잃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내 안의 여성성을 가꾸고 성장시키는 엄마가 될 수 있도록

이제 여자로서는 끝이지 뭐... 


결혼 전, 아이를 낳기 전 여자의 여성성은 꽃송이와 같다. 

예쁘고 눈에 띄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 같다. 

미적인 찬사, 오직 나에 대한 당신의 집중으로 하여금 여성성을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대개의 경우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하기 위해 그녀를 꽃송이를 매만지듯 하며, 여자는 꽃을 보듯 자기를 향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꽃이었던 여자는 아이를 낳게 된다. 


12달을 품었다가 세상에 나온 아이를 마주하게 되면 이제까지 인식하지 못한 채 잠재되어 있던 또 다른 여성성인 모성이 발휘되게 된다. 


아이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룬 듯 아이의 울음소리, 눈짓, 몸짓에 반응하며 모성 이전의 여성성은 뒤로 한 채 하루의 에너지를 몽땅 쏟아 아이를 키워낸다. 아이가 내게 눈을 맞추게 되고,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내 살결을 어루만지며 교감을 나누고,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와 안기게 되며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문득 거울 속에서 기미가 거뭇해진 푸석한 피부,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퀭한 눈매, 아이 손 기름이 묻어 알이 뿌옇게 된 안경을 비뚤게 끼고 있는 아줌마를 마주할 때 '이젠 뭐 애 엄마지...' 하면서 못내 씁쓸해질 때가 있다. 


이젠 협동정신으로 사는 남편이지... 하면서도 나를 보며 설레어하던 그 시절 남편의 모습을 아련하게 떠 올려 볼 때가 있다. 


외모와 관련된 여성다움은 진즉에 포기했고 성격마저 점점 드세지고 조교 말투에 굵직한 중저음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전두 지휘하게 된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고. 이제 여자는 끝이지 뭐~"

아주 쿨 한 태도로 과거 내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이루던 여성성과 이별한다. 


그러나 왠지 마음 한편이 저릿한 건 무엇 때문일까?

여자로서의 엄마란, 엄마의 여성성이란 어떠한 의미일까?

우리는 내 안의 여성성을 어떠한 태도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내적 인격으로서의 여성성에 대하여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융(C.G.Jung)은 남성과 여성의 심리적 특성은 시대나 국가, 문화와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또한 남성성과 여성성은 오직 남자와 여자에게 분리되어 해당되는 특성이 아니라고 하며 남자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측면을 아니마, 여자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측면을 아니무스라고 일컬었다. 


그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대해 Seele나 Geist(심혼, 영혼)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란 전 인류가 태초부터 타고난 본능과 같은 것으로 의미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여성성은 겉으로 보이는 여자다움을 넘어서 자기(Self)를 이루는 내적 인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적 여성적 특성'에 대해 설명하자면 '수용적이고 분석과 판단보다는 느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학설이나 보편적 진리보다는 개인의 감정이 중요하며', '보편성보다는 개인성이 강하다, ', '낭만과 창조적 영감'또한 심리적 여성성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 또한 여성성이 개인의 '인격'과 관계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우리 안엔 여성성의 인격이 존재하는 것이며 여자로서는 끝이라고 인식함에서 비롯되는 허전함은 나를 이루는 인격의 일부가 소실되는 것 같은 상실감에서 비롯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 이전에 여자의 여성성이 꽃송이와 같았다면
새롭게 키워내야 할 여성성은 꽃나무와 같다.


꽃은 열매를 맺으며 지게 된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나의 여성성이 마치 열매를 맺기 위해 떨어지는 꽃처럼 떨어져 나가 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여성성이란, 나를 이루는 인격의 일부이기에 결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신 변화되고 성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여성성을 키워가는 주체는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를 위해 기꺼이 꽃을 떨어뜨려 대지가 되는 엄마들. 


아이가 세상에 뿌리내리게 하고 미래를 살아갈 마음의 자양분을 쌓게 해 주며 감당하기 힘든 홍수와 같은 상황 속에서 버텨낼 수 있도록 지탱해주고받아내어 주는 땅이 되어 준다. 


그리고 내면에는 새로운 여성성을 싹 틔워야 한다. 


엄마 이전에 여자의 여성성이 마치 꽃송이와 같았다면 새롭게 키워내야 할 여성성은 꽃나무와 같다.


이전보다 중심을 잘 잡고 바람에 덜 휘청거릴 수 있는, 


나 자신의 성취의 열매도 함께 맺어 갈 수 있는,


매혹적이진 않지만 청아하고 은은한 향을 풍겨낼 수 있는,


한 송이 꽃처럼 유독 눈에 띄진 않지만 주변과 더 잘 어우러질 수 있는,


미적인 즐거움뿐만 아니라 그늘과 휴식을 줄 수 있는,


꽃나무와 같은 여성성을 마음속에 건강히 자리 잡게 해야 하는 것이다. 


꽃나무와 같은 여성성을 키워내기 위하여


여성성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킨다는 것은 곧 내적 인격의 성숙을 의미한다. 


우리가 소위 여성적이다라고 일컫는 여자의 이미지는 하나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이브처럼 섹슈얼한 여성, 황진희처럼 낭만적인 여성, 신사임당처럼 지혜롭고 현명한 여성, 성모 마리아상에서 표현된 것처럼 영적 헌신으로 지양된 여성 등 다양한 여성상이 존재하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적인 특징은 마치 심리적 발달 단계처럼 성숙의 차이가 있다고 보인다. 


여성성이 내적 인격의 일부라고 한다면 우리의 내면이 성숙해지기 위해선 내 안의 여성성 또한 발전하고 성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앞서 '마음에 꽃나무로써의 여성성을 키워내는 것'은 성숙한 여성성을 지향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 심미적인 것에서 아름다운 맘 자리를 갖추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고,


자기에 대한 관심의 집중을 수용과 받아줌의 미덕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감정에만 충실했던 것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지혜와 현명함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은 외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한다거나 낭만을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과거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려있던 꽃을 튼튼한 나무에 맺음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꽃이 여성성이라면 꽃줄기나 나무 기둥은 여성성을 포함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장된 여성성이 뒷받침될 때 이전의 반짝이고 예뻤던 어린날의 여성성을 되살려내고 가꾸는 것은 내면의 여성성을 더욱 다양화시키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나무에로의 변화를 거부한 채 꽃송이로만 남고 싶어 하는 집착일 것이다. 


늘 화려하고 주목받는 꽃송이로서 열매를 맺은 뒤에도 떨어지지 않고 자기 모습을 부여잡으려 한다면 그 꽃은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스스로는 어떠할까?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더 성숙한 사회의 역할을 부과받아감에도 여성성을 성숙되게 변화시키지 못한 채 늘 미적인 찬양을 받아야 하고, 자기에게만 집중되는 관심과 사랑으로 여성성을 확인받으려 한다면 그녀는 나이 들어가는 얼굴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또한 예전처럼 자기를 대하지 않는 남편에게 늘 서운함을 느끼고 그를 대신해 자기가 여자임을 느끼게 해 줄 또 다른 누군가를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은 꽃이다.

엄마가 된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여자로서 나는 없어졌어."라고 말 하지만, 나를 잃지 않으며 또 나를 사랑하며 한 남자의 아내와 아이의 엄마가 되기 위해선 우리 안의 여성성을 소중하게 가꾸고 키워주어야 한다. 


여성성이란 우리가 생물학적인 여자임을 떠나서 온전한 나를 이루는 중요한 내적 인격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던, 시간이 더 지나 할머니가 되던 우리는 마음에 여성성이라는 이름의 꽃이 피고 살아간다. 


다만 열매를 맺으며 이전의 꽃은 지고, 새로운 형태의 꽃이 피어난다. 그 꽃은 야리야리했던 줄기에서 나무 기둥의 가지에 봉오리를 맺고 재 탄생한다. 


나는 열매를 맺으며 자연스럽게 시들해진 꽃잎은 용기 있게 떨어뜨리고 아이를 위해 기꺼이 땅이 되어주기로 했다. 사실 이 과정이 안타깝기도 하고 허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나만의 아름다운 꽃나무를 생각하는 것으로 빈자리를 설렘으로 채울 수 있다. 

여자로서의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거듭나는 것임을 잊지 않으며 여성성의 꽃밭을 일구어 낼 맘 자리를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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