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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봄 Jun 19. 2023

드림팰리스 -어디에나 있지만 어느 곳에도 없는 곳

귀속감과 박탈감 사이에서 '죽기 살기'로 살기

참으로 오랜만에, 긴장강도와 밀도가 높은 영화를 만났다. 112분이 지나는 동안 몇 번이나 숨을 참으며 영화에 몰입했는지 모른다.


가성문 감독의 <드림팰리스>는 ‘갑’이 만들어놓은 시스템 안에서 분투하는 ‘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산업재해와 미분양 아파트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중심인물 혜정이 유가족모임과 입주자 연대를 오가며 살아내기 위해 귀속과 탈주, 박탈 등의 변주를 겪는 것을 큰 서사의 축으로 활용하고 있다.  


영화는 혜정이 셀프세차장에서 차 뒷유리창에 붙은 스티커를 카드로 긁어서 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은 혜정은 '투쟁'이라는 붉은 글자들을 떼어내고 서둘러 세차장을 빠져나온다. 바닥에 버려진 투쟁이라는 글자들이 그녀가 내던진 구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쟁 구호를 내던진 이후 혜정은 바쁘게 드림팰리스를 향해 달린다. 그녀의 차가 달리는 길 왼쪽으로는 우뚝 선 아파트가, 오른쪽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가 펼쳐진다. 황무지를 벗어나 드림팰리스로 향하는 길이지만, 혜정은 아직 어느 곳에도 닿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드림팰리스라는 번듯한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황토물이 쏟아지는 수전. 혜정은 분양사와 입주자 모임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지만 모두 하자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미분양 물량을 해결해야 하자보수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분양사와 하자 이야기로 아파트 가격이 하락할까 걱정하는 입주자들 사이에서 혜정은 생수를 쟁여놓고 사는 것을 선택한다. 투쟁이라는 구호를 내던지고, 남편의 합의금을 받아 마련한 아파트에 입성한 혜정은 더 이상 투쟁의 구호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하지만 유가족 연대에서 함께 투쟁했던 수인에게 아파트를 소개해주고, 수인이 싼 가격에 계약을 하게 되면서 입주자 모임과의 갈등은 고조된다. 제값을 주지 않은 입주자라면서 수인의 이삿짐 차를 막아선 기존 입주자들 때문에 수인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 앞서 수인마저 유가족 연대에서 빠져나오게 되면서 혜정은 남은 유가족들과의 갈등이 깊어졌는데, 이제 수인과도 관계가 틀어져 버린 것이다. 자신을 소개해주고 인센티브를 챙겼다고 오해하는 수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만 수인에게 제대로 전달될 리 없다. 혜정은 꼬일 대로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어낼 힘도, 의지도 없다.


그러는 사이, 유가족 연대 회장의 죽음이 전해진다. 조문을 다녀온 혜정은 수인을 찾아가 용서를 빌지만 수인은 전보다 더욱 날 선 태도로 혜정을 몰아붙인다. 구치소로 자신을 만나러 왔던 혜정에게 독설을 쏟아부었던 그날처럼 말이다. 감옥에 갇힌 건 수인이었지만, 혜정 역시 죄책감의 감옥에 갇혀 버린 모습이었다. 역시나 방범 창살을 부여잡고 매달려 우는 혜정을 서슬 퍼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수인. 각자의 감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어느 날 밤,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 아파트 단지 안으로 이삿짐을 들이려 시도하던 새로운 입주자들. 한 대가 무사히 정문을 통과하고 이어 수인이 탄 이삿짐 차도 정문 안으로 들어오는데, 기존 입주민들이 달려와 막는 통에 사고가 나고 만다. 아수라장이 되고만 아파트 단지. 시공사와 분양사가 만들어 놓은 말도 안 되는 시스템 속에서 고스란히 피해를 받은 이들끼리 아귀다툼을 하는 모습은 꽤나 서글프고 참담하게 느껴진다.


입주자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연대하고, 집단의 목소리를 낸다. 자본을 향한 그들의 쟁투 방식이 너무나도 저열하고 과격해 보이는 동시에 전체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타자의 현재를 파괴하는 걸 서슴지 않으니 말이다. 자본의 민낯은 원래 그러하니까. 하지만 매 순간 분출되는 저마다의 여과되지 않는 욕망들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저마다의 사정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모두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에 서슴지 않게 되는 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구조에 더욱 분노가 치미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집단 이기주의'나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는 식의 말로 아우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충분치 않다. 이해관계가 상충할 수밖에 없게끔, 그런 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악해서, 한 인간이 잘못을 해서라고 말하는 건 너무 쉬운 방법이다. 을끼리 반목하게 되면 가장 편하게 상황을 통제하고 장악할 수 있게 되는 건, 갑뿐이니까.

실재의 공간이 환상이나 허상의 주조로 채워지는 것처럼 드림팰리스 역시 실재한 공간이지만, 그 생생한 리얼함을 만드는 것은 환상이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런 환상을 주입시키는 데 주력했을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구조 뒤에 숨어서 을들의 쟁투를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영화에서도 아파트를 시공한 시공사나 산업재해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지 않는 기업을 대변하는 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갑을 제외한 을들의 싸움이 얼마나 아이러닉한가를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모든 사건이 정리되고, 또다시 매일의 또 다른 현재가 진행된다. 혜정도, 수인도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연대하지는 못한다. 낯을 마주하지는 않고 지낸다. 어쩌면, 그렇게 죽기 살기로 살아내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사떡을 돌리는 이웃에게 3인 가족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혜정의 모습을 담았다. 팩 안에 꽉 들어찬 꿀떡 하나를 집어 먹는 혜정. 혜정은 아들 동욱과도, 수인과도, 유가족 연대와도, 입주자 모임과도 동떨어졌지만, 3인 가족이라는 허상을 표상하며 오늘도 살아간다. 살아낸다.

  



아리랑 시네센터에서 GV가 있었다. 배우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반가웠고, 진중한 가성문 감독의 설명도 참 귀하게 다가왔다.

김선영 배우는 믿고 보는 배우지만, 이번에는 이윤지 배우에게 더 큰 애정을 표하고 싶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아주 잘 살려 연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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