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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나는 주머니 Oct 24. 2023

출근길 아무 말 대잔치 10.

잔디 인형의 머리가 자랐다. 같은 날 같은 흙에 같은 씨앗을 뿌리고 같은 위치에서 같은 물을 주었는데 결과가 영 공평치 못하다. 정말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고, 그 떡잎은 태초의 씨앗에서 오는 건가. 숱이 모자란 잔디인형의 뒷모습이 영 아련하고 쓸쓸하다. 꼭 우리 오빠같, 아니 아니 우리네 아버님들 같이. 아버님들을 힘내십쇼. 기어코 월요일입니다. 힘을 내야지 뭐 별도리 있겠습니까.

오늘 출근길 버스는 정말이지 말 그대로 만원이었다. ‘안 계시면 오라이‘ 버스 안내양은 자동화 시스템과 바통 터치하며 사라지셨다. 우리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조금씩 구겨야 한다. 구겨주어야 한다. 팔과 다리를 넓게 펼치고 나의 안위를 굳건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나는 구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근 만원 버스 안, 이런 구겨지는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은 앞자리의 승객이 일어날 때가 아니라 등에 맨 백팩을 가슴에 안은 고등학생을 볼 때다. 내렸다가 다시 타는 모습들을 볼 때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목례하고 나누는 눈짓들을 볼 때다.

여드름이 가득 나고 책가방을 앞으로 맨 남자 고등학생이 버스가 멈추자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는다. 줌을 가득 당긴다.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을 찍는다. 다시 휴대폰을 교복 바지에 넣는다.

이 남학생이 성인이 되고 회사원이 되어 숱이 모자란 우리네 아버님처럼 쓸쓸하고 힘을 내야만 하는 그런 날, 그가 고등학생 때 만원 버스 안에서도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을 봤었던 사람이란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구름은 언제나 있지만 언제나 구름을 올려다볼 수 있는 어른은 많지 않다.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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