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나는 주머니 Oct 25. 2023

출근길 아무 말 대잔치 11.

비가 가을을 손잡고 데려왔다. 이봐, 거기 가을! 그렇게 꾸물대고 있으면 못써. 늦는 것도 습관이 된다구. 너무 늦은 것 같아 쑥스럽다고? 걱정 마 내가 같이 가줄게. 그렇게 비는 가을을 데려왔고, 오늘 나는 올 가을 처음으로 긴소매 셔츠를 꺼내 입었다.

버스 안에는 온갖 계절이 모여있다. 반소매 옷과 긴소매 옷의 가을, 그리고 섣부른 패딩의 겨울과 미련 남은 민소매의 여름. 바야흐로 계절들의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은행의 계절이 도래하고 만 것이다.

거리에 은행이 걷지 못할 정도로 많이 떨어져 있으면 이거 원 참 곤란하지만, 나무에 은행 받이가 있어서 은행이 하나도 떨어져 있지 않으면 그것도 역시 서운하다. 거리에 은행이 여섯 혹은 일곱 알쯤 떨어져 있었음 한다. 부담 없는 낭만을 살짝 몇 꼬집만 뿌릴 수 있다면. 그렇다. 이런 것을 우리는 욕심이라 부른다.

다음 주부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시작된다. 2023년에 열리는 2022 아시안게임이 어째 조금 머쓱하다. 마스크를 끼고 서로의 눈만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다. 4인이상 집합금지, 영업제한시간 9시, 열체크, QR코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코로나의 나날들이 아득하다. 이런 아득함은 그 나날을 지나온 자들만 느낄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오늘 갈아온 비트주스는 특별히 아주 신선하고, 점심으로 먹을 단호박이 특별히 꿀처럼 달다. 오늘 나의 스트라이프 셔츠는 특별히 잘 다려졌고, 오늘 아침 모닝커피는 특별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먹었다. 특별히 얼음을 두 개 더 넣었더니 특별히 더 시원하다.

별다를 것 없는 아침 일상에 조미료로 ‘특별히’를 뿌려보았더니, 왠지 오늘 나의 하루가 정말로 특별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특별히 다를 것 없는 특별히 좋은 아침이다. 일하자.

작가의 이전글 출근길 아무 말 대잔치 1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