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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나는 주머니 Oct 26. 2023

출근길 아무 말 대잔치 12.

어여쁜 호박을 보면 일단 눈과 입을 만들어준다. 먹는건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지.

오늘 새벽, 이어폰 충전이 가득 안되어있어 귀에 아무것도 꽂지 않고 산에 올라갔는데, 여느 때 같지 않게 세 분이 말을 거셨다. 한 분은 여기에 사나운 개 두 마리가 지나가니까 혹시 만나더라도 놀라서 뛰지 말고 천천히 걸으라 하셨고, 한 분은 어디서부터 올라왔는지 젊은 처자가 부지런하다며 인왕산이 아침에 오르기 딱 좋다고 자주 보자 하셨고, 다른 한 분은 청와대 뒷산에는 사슴도 나온다며 그쪽도 한번 가보라고 하셨다. 무척이나 다정한 말씀들. 이어폰을 빼니 이런 기쁨이 있네,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이어폰을 끼고 있는 순간에도 나에게 이어폰 너머로 말을 걸어왔을 분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아득해졌다. 대답 없는 침묵이 송구스러워도 이미 늦어버렸다.

아껴둔 이어폰 배터리로 하산을 하며 오랜만에 힙합을 들었다. ‘내 기쁨은 너가 벤틀리를 끄는 거야’라는 호기 넘치는 제목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정제되지 않은 20대 초반의 쌩 감성과 날 것의 목소리가 기분이 좋다. 나는 지금의 너를 지킬 테니 이 순간을 잘 기억해서 너는 나중에 너의 아이를 지켜,라는 패기가 기특하고 귀엽다. 아, 내 과거가 이 노래에 묻어있네. 이 노래를 만든 청년은 아마도 앞으로, 리쌍의 ’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의 시간을 지나, 윤종신의 ’좋니‘의 세월을 건너, 박진영의 ’니가 사는 그 집‘의 미련을 너머, 싸이의 ’아버지‘같은 무게를 견뎌,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황혼으로 가겠지. 우리네 인생에 큰 예외가 없다면 말이다. 그나저나 김광석 음악은 LP로 들어야 제 맛인데. 갑자기 잘 먹지도 않는 위스키가 먹고 싶어 진다. 아, 참고로 나는 ’내 꿈은 당신과 나태하게 사는 것‘이란 노래를 좋아한다. 빙빙 돌아 솔직하게 종합해 보면 ’내 꿈은 우리가 벤틀리를 끌며 나태하게 사는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그렇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도둑놈 심보라고 일컫는다.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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