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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나는 주머니 Nov 10. 2023

출근길 아무 말 대잔치 14.

이불속에서 오래도록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불 밖으로 나오니 한참 먼저 일어난 아이가 재활용 박스를 가지고 진지하게 쓰레기를 창조하고 있다. 쓰레기 더미 안에 앉아서 본인이 창조한 작품을 설명하는 모습에 사뭇 자부심이 묻어 나온다. 묻어 나온 자부심을 경청하여 들어준다. 아가, 너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쓰레기를 창조할 수 있는 멋진 아이야. 아이의 자부심이 공중에 흩어지지 않게 하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양말을 고민한다. 빨간 양말은 적나라하고, 스트라이프 양말은 재미가 없지. 연휴가 끝난 수요일이니 오늘은 하얀 레이스 양말의 기분. 곱게 양말을 신고, 잊어서는 안 되는 소지품들을 가방에 챙겨 넣는다. 태블릿 PC, 이어폰, 운동복, 도시락 그리고 사원증. 아이들에게 오늘 하루도 재미있게 놀아, 라는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7016, 1711 버스가 동시에 도착했고 1711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습관적으로 ‘날씨’를 검색한다. 오늘 오후에 잠시 비가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진다네. 다음 주까지 잔뜩 그려져 있는 해님 얼굴이 반갑다. 해님에게도 기분이 있다면 요즘 해님의 기분은 핫핑크 양말 기분이다.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옆 부서 부장님들을 만났다. 예쁜 양말을 신으셨네요, 라고 건네주시는 인사에 오늘 오후에 비가 내리고 내일부터 기온이 뚝 떨어지니 감기 조심하세요, 라고 화답을 드렸다.

자리에 앉아 PC를 켜고 20통의 메일을 확인하고, 텀블러에 작두콩차를 우렸다. 클래식 fm에서 조성진의 쇼팽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다. 조성진의 손가락에는 가을바람이 맺혀있네. 이 연주가 끝나면 따뜻한 커피를 받아와야지. 점심시간에는 아껴둔 무빙을 보며 유산소 운동을 할 것이다. 18시간 공복을 채운 후 오후 2시에는 샐러드를 귀하고 맛있게 먹을 것이다. 햇살이 찬란한 수요일, 완벽한 일상이다. 복귀할 일상이 있다는 것이 큰 행복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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