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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D Aslan Jan 17. 2021

전공의 일기.

5-32.

계절이 바뀌어 세상에 가을이 내렸다. 


높은 하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 나는 강릉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매 석 달마다 찾아오는 파견을 앞둔 때면,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환경에서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오묘한 기분이 든다.  


한 달의 파견 기간 동안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병원을 떠났다.  한강을 좌측으로 하고 강릉으로 향하는 길은 가을의 색이 담뿍 담겨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남들은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시간이었기에 강릉으로 내려가는 도로는 한적했다.  

오후 다섯 시경 서울을 출발해 강릉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 달 파견 전공의와 서둘러 재원환자에 대한 인계를 마친 뒤 근무를 교대했다.  


"어디 보자...... 다들 수술 환자구나.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환자는 없어 보이네. 다행이다." 


환자를 파악한 뒤 병동으로 향했다. 당직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병동에 도착해서는 내일 오전에 있을 회진을 대비하여 환자 상태를 파악했다.  


한 시간 가량이 흘렀고, 주변은 어느새 어둑해졌다.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에 고깃배들의 불빛이 아름답게 일렁였다.  


짐을 풀기 위해 기숙사로 향했다. 병원 본관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래된 건물이 기숙사이다. 한 달을 묵을 채비를 한터라 짐이 상당히 많았다. 낑낑거리며 짐을 들고, 방문을 열면 습기가 가득한 매캐한 공기가 나를 반긴다.  


'다시 왔네. 매번 올 때마다, 이 냄새는 적응이 안된다니까......' 


푸념을 내뱉으며, 강릉에서의 첫 날을 마무리 했다.  


강릉에서의 파견 생활은 그리 편하지 않다. 본원에서의 시스템과 상당 부분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계로 대신할 일들을 손수 챙겨야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환자 수는 본원의 1/4 수준이지만, 들이는 수고는 거의 비슷하다. 


강릉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주로 감염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방광염, 전립선염, 신우신염 등 다양한 염증 케이스를 접할 수 있으며, 이들의 중증도는 생각보다 높다. 이들 상당수는 의료접근성이 좋지 못한 곳에 거처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감염이 발생한 초기에 병원을 방문하기 어려워 병을 키우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강릉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어갈 때쯤, 서울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 난데 그 할아버지 응급실로 오셨네?" 


"그 할아버지가 누군데? 한두분도 아니고. 그 할아버지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 


"그 할아버지. Sarcoma(육종)" 


"엥? 얼마 전에 퇴원 잘하셨는데 왜?" 


"일단 열이 나서 ER(응급실)로 오셨는데, Lactic(젖산) 3.1이고, BP(혈압)도 떨어지고 아마 Septic condition(패혈증 상태)으로 가는 중인 것 같아." 


"마지막 Cx(fever study, 균 배양검사)에서 특별한 게 자라진 않았는데?" 


"일단은 Anti(항균제) 쓰고, 입원해서 봐야지, U/O(소변량)도 줄고 안 좋다." 


"아고...... 집에 가신다고 좋아하셨는데 우짜냐......" 


"입원장은 낸 거지?" 


"응 입원하셔야지. 너랑 각별한 것 같아서 전화했어. 끊는다" 


"떙큐, 복귀하면 찾아가 봐야겠다" 


"그때까지 버텨 주실지 모르겠다. 기분이 싸한데......" 


"잘 좀 봐줘. 부탁임" 


"그래 알았어. 오면 보자. 특별한 게 있으면 알려줄게" 


"오키, 수고"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는 얼마 전 퇴원하신 중절모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려주는 전화였다. 밝은 얼굴로 퇴원하셨던 할아버지가 감염이 발생하여 응급실로 내원하셨다는 소식에 걱정스러웠다.  



'마지막 날 Lab(혈액검사)도 괜찮았고, 배양검사도 특별한 게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출처: https://mdaslan.tistory.com/104 [의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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