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참 힘든 한해였다. 역술적으로 따졌을 때 삼재라도 되었으려나.
새로운 일이 주어졌고, 그것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스트레스는 온 몸을 휘감았다. 모르는 것을 함부로 모른다 할 수 없고, 회피할 수도 없는 상황. 결국, 눈을 떠서 퇴근을 하기 직전까지 매일이 고도의 긴장상태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몇 달이 지나니 숨은 붙었으나 정신은 말라버린 좀비가 된 것 같았지만, 여기에서 몇 년을 버티지 못하면 '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히고 말 것이었다. 그냥, 내 자신을 프로메테우스같이 긴 형벌을 받는 자로 여기기로 했다.
1주일을 버티기 힘들 땐 하루만 살고, 하루를 버티기 힘들 땐 딱 한 발자국만 걷자는 경험을 통해 근근이 삶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버티기 위한 힘이 너무 크다 보니 원래 좋아하던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기력했다. 글도 쓰지 않았고, 그림도 그리지 않았고, 책도 읽다 놓아버리는 일이 많았다.
웃기지도 않는 건, 남들이 보는 겉모습은 꽤나 괜찮아 보였을 거란 사실이다. 빌딩숲으로 출퇴근하며 복잡한 일을 하는 듯한 착시현상. 아, 어쩌면 내 안에서도 스트레스의 대가로 이 착시현상을 얻게 된다는 얼빠진 계산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새로운 일에 발을 들인지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나름의 고민 끝에 탈출구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전문직 시험이었다.
남편에게 2년만 아이를 전담해서 봐준다면 전문직 시험에 도전해 보겠노라 얘기했다. 그나마 잘 하는 건 공부로 성적을 내는 것이었던 나의 호기로운 출사표를 남편은 순도 100% 이성으로 반려했다.
네가 가져가는 시간을 가족들에게 어떻게 보상해 줄 수 있는지, 전문직 시험이 어떻게 더 좋은 미래를 줄 수 있는지 계산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시험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개업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맞다. 모든 미래의 결과물은 숫자로 명확히 계산될 수 없었고, 합격하리란 보장도 없었으며, 막연히 라이센스가 업무의 독립성과 시간적 자율성을 높여줄 것이라는 설득 또한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나는... 탈주를 시도하다 잡혀온 망아지마냥 의욕은 사라지고 반항심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 모든 일은 우연히 오지 않는다. 그가 그때 그냥 전문직 시험을 볼 수 있도록 나를 지지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오늘날의 사태는 아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