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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철 Oct 06. 2020

나는 사회인이다.


요즈음 TV에서 방영하는 “나는 자연인이다”란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한다.

마음이 끌려 본방뿐 아니라 재방 삼방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내가 만약 저 산속에 산다면 불편한 환경을 받아들이며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어디에 살든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기 방어를 해야 한다.


고구마 밭을 지키기 위해 이중 삼중의 철조망을 치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면 진정한 자연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매년 고구마 밭을 산짐승에게 내어 줄 수도 없지 않은가.

살아 있어야 자연인이지 굶어 죽으면 영원히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다.

원래의 주인인 야생의 멧돼지나 산짐승들과 생존경쟁을 어느 선까지 해야 하고 공존을 위한 서로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 선을 잘 지켜야 서로가 공존을 하고 자연을 누리며 살 수 있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멧돼지가 경계선을 먼저 넘었다고 법적으로 다툴 일은 아니다.


법률적 용어의 자연인은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격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으니 법률적 용어로도 합당하고, 어느 규칙에 속박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자연적인 용어에 더 어울린다.

사람의 흔적보다 동물이나 자연 그대로의 흔적이 더 많은 산속이나 섬에서 사회와 차단된 그들만의 문화와 환경을 즐기고 자연에 순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 살아 움직이는 한 폭 산수화 속의 신선 같기도 하다.


대부분의 식자재를 텃밭과 야산에서 구하고 일이 있어도 서두르지 않는다.

오늘 못하면 내일, 내일 못 하면 다음에 한다는 서두르지 않는 마음의 여유가 부럽기도 하다.      

항상 부러움과 대리만족만 있을 뿐 나는 “나는 사회인이다”라는 틀 속에서 살아간다.

자연인의 반대 개념인 “나는 사회인이다”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삶은 이렇지 않을까.


정해진 시간까지 출근해서 일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해야 정해진 임금을 받을 수 있다.

또, 약속된 날까지 금융권에서 빌린 대출금의 이자를 갚아야 하고 각종 공과금을 납부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날을 무시하고 사회인 야구단이나 각종 사회단체에 가입한다고 해서 사회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사회인은 정해진 시간, 약속된 날, 이 틀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이렇게 보면 자연인의 시간은 자유롭고 사회인의 시간은 구속에 가깝다.      


이 구속은 서명을 해서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서명과 상관없이 자연적이거나 부가적으로 발생한다.

보편적 사회인의 책임감으로 자연 발생적이기도 하다.

결혼을 하면 가족과 양가 부모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감과 의무가 생기듯,

사회인으로서 수없이 반복되는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책임과 의무가 발생한다.

물론 권리도 발생하지만 이 권리를 잘 못 쓰면 패가망신의 지름길이 되기도 하고 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사회인이 늘 시간에 쫓기며 사는 것도 아니다.


주말이면 영화 한 편을 즐길 수 있는 여유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따듯한 시간을 마시는 서정적인 면도 있다.

아들딸이 자라나 진정한 사회인으로 자리 잡는 모습에 만물을 창조한 신이 되기도 한다.      

사회인을 자연인으로, 자연인을 사회인으로 강제 이주시키면 둘 다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인이 바라보는 숲 속의 나뭇잎은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으로,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산새들은 쇼핑 나온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자연인이 바라보는 도시인은,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고, 자동차는 멧돼지로 기차는 능구렁이로 보이지 않을까?      


자연으로 들어간 사연도 다양하다.

도시 생활이 생리와 맞지 않아, 사업실패로 삶의 희망을 잃었을 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을 당했을 때,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지병으로 삶을 포기했을 때, 마지막으로 택한 곳이 자연이다.


결국,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자연이 치유해 주는 것이다.      


매회마다 자연인의 심정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장으로서의 맡은 바 책임을 못해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미안하기는 사회인도 마찬가지다.

하루를 고무줄 늘이듯 늘여 시간을 쪼개고 쪼개 투잡 쓰리잡을 해도 경제적으로 그렇게 나아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저녁이면 온 가족이 식탁에 마주 앉아 여유로운 식사를 해 본 지도 오래전 일이다.

가족과 함께 그 흔하디 흔한 해외여행도 가지 못한 사회인도 많다.

경제적인 여유는 고사하고 웃음기 사라진 주름만 보여주고 살았으니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늘 가지고 산다.     


바쁘다! 바쁘다! 하지 말고 일 년에 한두 번,

삼사일 정도 시간을 내야겠다.


삶에, 내려놓을 시간마저 빼앗기기 전에,


속세와 차단된 시간 속을 산책하는,

한 폭 산수화 속의 신선으로 살아 볼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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