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91)
'Alors...(자, 그럼...)'으로 시작된 대화는
'vous êtes adorable(당신은 사랑스럽군요)'란 말로 끝났다.
얼마 전, 근무하던 서점에서 벌어진 일. 한 외국 여성이 책방을 둘러보다가 카운터로 쓱 와서 증정용으로 비치해 둔 굿즈를 살펴보고 있었다. 눈으로만 보고 있기에 공짜이니 가져가도 된다고 슬쩍 말을 걸었다. 스티커 디자인이 참 예쁘다고 영어로 말하던 그녀의 입에서 'alors', 불어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럼...'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러한 맥락에선 별 뜻 없이 뭔가를 고민할 때 입버릇처럼 툭 나오는 추임새에 가깝다. 어쨌든 영어 'well' 대신 불어 단어를 들은 난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답시고) 반가운 마음에 '프랑스어를 하시는군요?'라고 재차 말을 건넸다. (불어권 국가가 여럿이다 보니 내 경우엔 다짜고짜 프랑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이런 식으로 묻는다)
벨기에서 왔다는 그녀는 서울의 한 책방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구사하는 이를 만난 걸 무척 신기해했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잔뜩 있었는지, 조금 전 쭈뼛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야말로 폭풍 질문을 해왔다. 여행할 때면 그녀는 불어나 영어로 출간된 해당 나라의 문학 작품을 사 모은단다. 여기서도 한국 문학 중 영어나 불어로 된 책을 찾고 있던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엔 문학이든 다른 장르든 외서는 없어서 아쉬운 사과의 말을 전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까운 곳에 외서가 잔뜩 있는, 영어 서적뿐만 아니라 몇몇 유럽 언어 서적까지 보유한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있다는 것! 나도 가끔 불어 원서를 산 곳이라 분명 외국 언어로 된 한국 문학 책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 주며 위치를 알려주었다.
당찬 내 모습에 믿음이 갔는지 그녀는 불쑥 소설 한 권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celui qui revient)을 추천해 주었는데, 파리에 살 때 사서 읽었던 책이기도 해서 번역본이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재고가 있는지를 알아내기 쉽지 않다는 게 게 문제였다. (이 내용은 다른 글의 소재로 삼은 적도 있다. 외서는 재고 조회가 정확히 안 돼서 보물찾기 하는 기분으로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간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불어판 한국 소설 자체가 많지 않아서 혹여나 헛걸음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매장에 전화해서 물어본다고 했다. 손님은 꼭 그 책이 아니더라도 다른 작가의 책이나 불어가 없으면 영어 책을 사도 된다고 했으나 이미 통화 버튼을 누른 뒤였다.
ARS 자동응답과 상담원 연결을 거쳐 해외 원서 담당자의 번호를 알아냈다. 받아 적은 번호로 한 차례 더 전화를 걸어 한강 작가의 외서가 영어랑 불어 둘 모두 광화문점에 있음을 확인했다. <소년이 온다>의 경우 외서 제목이 각각 달라서(영어는 'human act') 이 작품을 콕 짚은 건 아니고 한강 작가의 책이 있냐고 뭉뚱그려 물어봤다고, 추천해 준 책 말고 다른 책이 있을 수도 있다고 손님에게 해명 비스무리한 설명을 덧붙였다. 연신 고맙다는 그녀의 인사가 쑥스러웠던 난 괜히 벨기에 홍합&감자튀김이 그립다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벨기에에 또 여행 가면 되죠!', 쿨하게 엉뚱한 대답을 받아치는 그녀는 돌아서며 내게 칭찬의 말을 한마디 더 건넸다.
vous êtes adorable !
사랑스럽다니. 친절하다는 칭찬에 사랑스럽다는 형용사가 끼어드는 게 어색했지만 듣기에는 퍽 기분 좋은 말이었다. 사랑스러움과 거리가 먼 외양을 지니고 있어서 어색하게 들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랑스럽다는 노래 가사가 떠올라 조금은 낯간지러운, 아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간지러운 느낌도 좀 들었고. 나 역시 여행 가서 사려고 했던 걸 쉽게 찾지 못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찾아낸 물건도 있고, 도움이 있었음에도 구하지 못한 적도 있다. 결과가 어쨌든 간에 내 기억 속 그들의 모습도 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리저리 수소문하는 모습 자체에,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음에 고마움을 느꼈더랬다. 막상 수고를 들여 본 당사자의 입장에선 그리 큰 수고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갓난쟁이 때나 들었을 법한 사랑스럽다는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