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96)
대중교통을 탈 때 찍히는 금액은 네 자리다. 시내버스냐 광역버스냐 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자릿수는 바뀌지 않는다. 내릴 때 찍히는 금액은 한 자리에서 세 자리 사이다. 거리에 따라 혹슨 환승 여부에 따라 '0'이 찍히거나 100원 200원 사이의 금액이 찍히니까. 그런데 탈 때 네 자리가 찍히고 내릴 때도 네 자리가 찍힌 오늘은 아침부터 어안이 벙벙했다.
대중교통 시스템이 나도 모르는 사이 바뀌어서 하차 때 태그를 또 하면 요금을 한 번 더 결제했을 리는 없다. 어안이 벙벙한 대상은 시스템이나 다른 이유가 아닌 나였다. 내리기 전 이미 낸 버스 요금을 그대로 또 낸 걸 알아차린 순간 '이래서 후불교통카드 기능은 카드 하나에만 넣어 놓는 건데...' 하고 씁쓸한 후회를 했다. 이 모든 건 카드를 분실했던 약 오 년 전의 일 때문이다.
인천공항에 내리고 나서 카드가 사라졌다는 걸 문자 알림을 통해 받았다. 당시 출국할 일이 많았던 탓에 해외 체류 때는 새로 만든 외화카드를 사용했다. 체크카드랑 외화카드 둘 다 쓸 수 있어서 신용카드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해외에서 쓰지 못하도록 차단해 두었다. 그때 이미 카드를 잃어버릴 걸 예상한 건 아니었다. 해외에서 쓸 수 있는 카드를 세 장이나 들고 있으면 '온 김에 사자'라며 펑펑 써 댈 것 같은 내가 못 미더워서 그랬을 뿐. 그런데 웬걸, 차단해 둔 덕분에 해외에 떨구고 온 카드는 아무런 금전적 피해 없이 사용이 중지되었다. 내 카드를 주운 몹쓸 녀석이 몇 번이고 결제 시도를 하는 바람에 해외는 물론 아예 카드를 쓰지 못하게 일시정지 처리가 됐던 것이다. 그 알림을 받고서야 카드가 지갑 안에 있어야 할 카드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체크카드엔 후불교통카드 기능을 넣어두지 않았고 외화카드는 교통카드로 쓸 수 없었다. 일회용 표를 사서 공항철도를 타면 되니 문제라고 한 게 좀 민망하다. 문득 신용카드는 분실했으니 새로 만들어야 하고 체크카드에 후불교통카드 기능을 넣으려면 적어도 하루는 걸릴 거란 생각에 티머니를 구입하기로 했다. 마침 지하철 표 판매기 옆에 티머니 자판기가 있었고, 다행히 현금도 가지고 있어 티머니를 사서 충전을 했다. 철도야 키오스크에서 표를 사서 타면 된다지만(보증금 환급이 귀찮지만) 버스는 티머니라도 없으면 현금을 내야 하니까 하루 이틀이라도 편하게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려는 속셈이었다.
체크카드에 후불교통카드 기능을 금방 넣을 수 있어서 티머니는 생각보다 며칠 쓰지 않았다. 신용카드도 새로 하나 만들었다. 카드를 또 분실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 교통카드로도 쓸 수 있게 해서. 태그 기계가 교통가드로 인식할 카드가 지갑에 두 개 꽂혀 있으니 타고 내릴 때마다 한 장만 따로 꺼내서 써야 하는 게 불편했지만, 내 칠칠맞음의 업보라서 감수해야 할 불편함이었다. 태그할 때마다 카드를 꺼냈다 넣었다 하는 게 귀찮긴 했지만 익숙해지니 불편하다고 불평할 만큼의 번거로움은 아니었다.
두 장 다 교통카드로 쓸 순 있지만 대중교통 이용 시엔 신용카드만 썼다. 예전처럼 신용카드를 분실했을 때만 임시로 체크카드를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방심한 나머지 버스탈 때 체크카드를 찍어버렸다. 정류장을 10m 정도 남겼을 때 타려는 버스가 슝, 내 옆을 지나가서 그걸 잡아 타겠다고 뛰느라 정신이 빠진 탓이다. 카드를 꺼냈다가 넣는 동작만 몸에 익었지, 체크인지 신용인지 확인하는 습관은 들이지 못했다. 그나마 탈 때 찍은 카드가 체크카드란 걸 기억했다면, 내릴 때도 같은 카드를 찍었을 텐데... 늘 그랬듯 신용카드로 찍었을 거라 여긴 자만이 화근이었다.
탑승 태그를 체크카드로 했을 거라고는 아예 생각도 못하고 내릴 땐 신용카드를 찍었다. 습관은 습관대로 참 무섭다. 내릴 때 평소처럼 '0'이 찍히지 않고 탈 때 본 금액이 다시 찍혔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간혹 하차 태그인 걸 알려주려고 장치에서 나오는 '하차입니다' 음성 안내처럼 '체크카드입니다', '신용카드입니다' 따위의 안내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 근데 그것도 결국 찍고 나서 나오는 안내이니 무용지물이구나...
교통카드 잔혹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엔 당혹보다 더 큰 짜증을 선사했다. 지하철로 갈아탈 때 환승할인을 받을 수 없었으니까. 체크, 신용 둘 다 탑승 태그만 했지 하차 처리를 하지 않은 셈이다. 뭐로 지하철을 타든 천이백 원인가 천삼백 원인가의 네 자릿수 금액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훅 솟았다. 고작 천 얼마 교통비 그게 뭐라고, 온라인으로 살 건 잔뜩 다 사놓고 배송비 이삼천 원 아까워하는 꼴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