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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끝없는대화 Jul 12. 2021

게으름에서 시작된 미니멀라이프

가능성을 준비하는 텅 빈 책상

 나에게 책상은 창조와 가능성의 공간이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계획을 세우고, 글을 쓰고, 무언가를 만든다. 빈 책상은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다. 가능성이 열려있다. 어질러져 있으면 우선 물건을 치우고 나서야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 안 그래도 낮은 실행력에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매일 저녁 책상을 쓰고 나면 스탠드 조명을 제외하고 텅 빈 여백으로 되돌려놓는다. 물건들이 정해진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시간은 일 분이면 족하다.


 아무것도 올려져있지 않으면 청소할 것도 별로 없다. 방바닥도 그렇다. 밀대로 슥슥 닦으면 끝이다. 미니멀리스트의 집을 보면 밖에 올려놓은 물건은 최소한이고 수납공간에 넣어두는 경우가 많은데, 청소가 쉬우며 여백의 공간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기 때문에 점점 그런 쪽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미니멀 라이프의 방향이 물건을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시각적 피로와 청소를 줄이는 것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니까.)

 책상 옆에는 타워형 책장과 5칸 철제 서랍이 있다. 그곳에 책과 노트, 아이패드, 노트북, 학용품과 생활용품, 공예용품들이 대부분 들어가 있다. 옷과 생활용품은 많이 비웠는데 책과 공예용품은 참 비우기가 쉽지 않다.


거는 옷은 옷장에, 접는 옷은 침대서랍에 수납한다.

 가진 옷들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개수가 점점 늘어난다. 100점 만점에 40점인 옷이 100벌 있다고 4000점이 되진 않으니, 그냥 40점짜리 옷들은 비우고 새로운 옷을 사야 한다. 버리지 않고 잘 활용하면 좋겠지만 나처럼 패션에 잼병인 사람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 애매한 옷들은 우리에게 만족감도 주지 않고 옷장의 자리만 차지하며 이미 옷이 많다는 은은한 죄책감에 좋은 옷들이 새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몇 벌의 질 좋은 명품만 가지라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그 의견에 반대한다. 옷은 소모품이고 몸을 보호해주는 사회적 도구일 뿐이다. 큰돈을 써야 할 가치를 못 느낀다. (패션을 사랑하거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분들은 논외) 품질과 심리적 만족감이 80점 정도인 옷을 용도별로 한두개씩 선별하여 소유하면 아침마다 고민하는 수고가 줄어든다. 사진에 나와있지 않은 옷까지 포함하면 약 40벌의 옷을 소유하고 있는데, 사회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다. 더 줄이는 것을 고려중이다.

 옷은 많은데 입을 옷이 없다면 현재 가진 옷의 파악과 분류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캐주얼한 티셔츠 10개가 있어도 슬랙스에 입을 포멀한 셔츠 하나가 없으면 옷이 없다고 생각된다.

 분류 예시) 밝은 색/어두운 색, 캐주얼/ 포멀, 봄 / 여름/ 간절기 / 겨울 / 혹한기


 소장한 책은 보통 내킬 때마다 꺼내 읽는 친구들인데, 좋은 문장이나 좋은 삶의 태도를 손안에 쥐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들이다. 그런 책은 극히 한정되어 있고 대부분의 책들은 다시 읽지 않는데, 그런 책들이 공간을 차지해 새로운 책이 들어오기 어렵게 하고, 독서량이 줄어든다고 판단했다. 책의 소명은 읽히는 것에 있는데, 읽지도 않는 책을 가둬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선순환을 위해 다 읽고 소장할 생각이 없으면 알라딘에 판매하고, 돈을 보태서 새로운 책을 사 온다. 매장에 없는 책이나 신간은 서점에서 사서 읽는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2주에 10권씩 읽었던 학생 때와 달라진 독서량과 독서습관에 맞춘 새로운 도서 재고관리 시스템이다. 현재는 저 책장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조절하고 있다. (50권 안팎의 수납력은 애독가를 강제 미니멀하게 만들어준다.)


공예용품

 공예용품은 참 비우기 쉽지 않다. 왜냐면 대부분의 취미는 도구와 재료에서 출발해서 더 좋은 도구와 재료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특정 도구가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기도 하다. 가짓수와 가격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장비병이 없는 편인데도 5단 서랍 하나가 전부 공예재료로 가득 차있다. 마크라메 실, 자수실, 코바늘, 대바늘, 가죽공예 도구, 원단, 털실, 나무 오일, 컴퍼스, 펠트지 등등...

 무형문화재 선생님께 전통 소목 수업을 듣고 있어서 선생님의 공방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목재와 수공구, 전동공구가 상상 이상으로 정말 많았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좋은 도구가 없는 장인은 없구나 싶었다. 좋은 한우는 굽기만 해도 맛있고, 좋은 재료로 만들면 모자란 재주로도 그럴싸한 작품이 탄생한다는 변명을 대며 오늘도 공예용품은 고이 서랍에 잠들어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실 일주일에 책 두 권도 읽지 못하고, 수공예 취미는 이사를 전후로 5개월째 손도 안 댔다. 공예용품은 가능성의 통로, 예비 밥벌이라는 생각에 정리가 쉽지 않은데, 어찌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최선의 해결책은 있는 도구와 재료를 활용해서 뭔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좋아하면서 한 번 시작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은 게으름에서 시작되었다. 번거롭게 청소하기 싫어서 다 집어넣고, 정리가 싫어서 그때그때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외출할 때마다 옷을 고르는 것이 싫어서 선택지를 줄여버렸다. 부지런해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게을러서 정리할 것을 만들지 않는다.

 

 비우기의 초반에는 자꾸 수납공간을 열어보며 비울 것들을 찾아내고 신이 나서 버렸는데, 미니멀 라이프가 왜 시간을 절약해준다는지 이해를 못할 만큼 시간을 꽤 많이 썼다. 언제부턴가 정리의 시스템이 잡히고 비울 것이 적어지자 대청소랄 것이 없어지고, 정리에 시간을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 게으른 나에게는 정리와 청소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책상을 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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