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나케이 Feb 06. 2023

나를 내어줄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내것은 없었다.

 지적할 것인가? 가르칠 것인가?


내가 아무리 박사라고 해도 박사과정 학생을 내가 뭐라도 아는 양 지도를 하는 건 내 살을 깎아야 겨우 가능한 일이다. 특히나 육아휴직 후 복직한 지 이제 겨우 1년, 쌓인 것보다 빠져나간 게 더 많은 나 같은 아줌마는 더더구나 누구든 뭐든 내가 아는 거라며 한마디라도 해야 할 때.. 난 딱 이 고민에 빠진다..'지적할 것인가.. 아니면 진짜 가르칠 것인가..'



힘들어도 견딜만했던 지난 1월, 한 달 내내 과제 하나 써내는데, 사활을 걸었다. 첫 주는 워밍업 한답시고 마음 달래기를 했고, 둘째 주는 염치 불고하고 전 직장 동료에게 같이 과제를 내자며 용기 내어 말을 꺼냈다. 혹시나, 이제 써먹을 때 없는 나를 거절한다면.. 괜찮은 척 둘러댈지, 사실대로 이해한다고 도와달라고 할지 엄청 고민했었다.  



" 박사님, 오랜만이요~ 바쁘죠? 음.. 나.. 과제 하나 내 볼려는데요.. 아무래도 신약개발과제는 독성이 빠지면 구색이 안 맞잖아요~ 가능하시겠어요?

" 하하하하 묻따말(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죠)이죠, 저야 말로 영광이에요. 큰 과제에 제안해 주셔서요. 세상에 대단해요 역시, 추진력!! 복직하고 아직 정신없으실 텐데.. 같이 가 봅시다~"

"고마워요.. 사실 제가 여유 부릴 처지가 아니라서요.. 당장 연구비가 없어져서.. 연말부터 과제 공고만 보다가 자격만 맞으면 일단 시도해 보려고요.. 제가 너무 계획 없이 하자고 한건 아닌지 염지 없지만, 감사해요."



팀 구성이 끝나고, 3일 만에 연구계획서를 써서 3팀과 공유했다. 연구의 전반적인 내용을 먼저 작성하고 공유해야 각 팀들이  각자의 역할을 써넣을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뭉그적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이메일로 회람하며, 연구계획서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동시에 연구비 작성, 기타 첨부서류까지 설연휴 전날 겨우 최종본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난 내일부터 전을 부쳐야 하니까.. 연휴 직후 마감이라 연휴 내내 마음이 안 편했지만, 시간을 낼 수는 없었다.   



비록 마음에 다 차지 않지만, 마감이 있다는 사실은 이제 그만하라는 신호 같아서 가끔 반갑다. 어차피 다시 손볼 수도 없으니.. 공동 연구자 분들께 무사히 과제를 제출했다는 소식과 다시 한번 감사하는 인사와,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공유드리겠다며 무거운 마음도 전했다. 흡사 전쟁을 치른 것 같았다. 누구와 공유할 수 없었지만, 나는 전사했다. 결과는 또 나를 뒤 흔들어 놓겠지만, 나는 안다. 과제가 선정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항상  제출 후 마음이 별로다. 괜히 낸 것 같고, 떨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한데, 결과가 나오면 나는 책임지고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슬픔도 3배로 온다. 허탈한 마음에 멍하니 오랜만에 시간에 기대어 있는데, 



"어, 시간 괜찮으세요? 저 연구과제 쓰는 거 봐주시기로 하셨는데요"

내가.. 그래.. 아 그랬구나.. 박사과정 학생 연구과제 봐줘야 하는 숙제가 또 있었다.. 나원 참.. 내 앞가림도 못하는 내가 연구교수랍시고, 이거를 어떻게 봐줘야 할까.. 멋쩍은 학생이 먼저 말을 건넸다.



" 조금 있다 올까요?" 라며 미소를 건넸다. 

" 네가 봐도 내가 힘들어 보이니? 괜찮아, 내가 잠시 망설였던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사실 어제 학생의 연구계획서를 다 훑었었다. 그리고 살짝 고민에 빠졌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아니면, 그냥 알려줘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빨간펜 선생님이 될 판이었다. '이대로 그냥 괜찮으니 마무리해서 제출해 보라고 할까' 아니면, '정말 내가 가르쳐 줘야 할까?'



참 아이러니 했다. 과제를 요청할 때, 너무 당연한 듯 다 알 거라고 생각하고 건넨다. 절대 물어보지 않는다. "과제 써 봤어요?"라고.. 그리고 열심히 써가면 다리 꼬고 앉아서 또 열심히 보란 듯이 지적질을 시작한다. 당연히 모르니까 알려줄 거라고, 가르쳐 줄거라 생각했는데, 알아보지도 못하게 빨간색으로 환 칠을 해 놓고서는 다시 써오란다.. 썩을.. 뭘 다시 해오라는 거야 내가 알아먹은 게 하나도 없는데..



상대의 지적을 받아 들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나는 억울했다. 억울해서 하나도 귀어 들어오지 않았다. 배운 게 아니라, 나한테 마치 맡겨놓은 세탁물이 원하는 대로 세탁되지 않아서 불평하는 손님 같았다. 나는 그냥 알려주기로 했다. 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난 조사가 틀렸느니, 내용이 앞뒤가 안 맞느니, 하는 그런 지적질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친구도 이걸 원해서 나한테 배우러 온 것도 아닐 테고.. 안다.. 도대체 자기가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선정이 되고 말고는 이후의 문제이고, 이 숙제를 다 매워서 얼른 자기 손을 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 게임의 룰: 누군가 우리를 평가한다는 사실"
1. 과제 요구서를 먼저 파악한다: 사실 여기에 답이 다 있다. 출제자의 의도가 여기저기 숨어있다. 원하는 용어, 연구 범위.. 여기서 일단 판을 먼저 짜야한다. 내가 가진 패와 비교해 가면서 말이다. 대충 감이 온다. 과제에 목숨 걸지.. 그냥 운을 한번 노릴지..

2. 평가지표 항목을 확인한다: 점수는 100점 만점, 빠짐없이 항목에 맞춰 내용을 구성하면, 만점은 아니지만, 최소한 평가자가 아주 좋아한다. 점수 매기기 아주 편해서. 성의가 있어 보인다. 

3. 가산점 항목이 있는지 확인한다: 점수는 챙기는 것이다. 거저 주는 뭔가 있다면 최대한 활용한다.

4. 별첨이나, 첨부 서류 여부를 확인한다: 간혹 여기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서류 때문에 마감 전에 계획을 완전히 수정해야 하는 아픔을 겪는다. 여러 팀과 함께 하는 과제일 경우 각자 사정을 몰라서..

5. 과제계획서 내용 작성을 시작한다: 이제 그냥 열심히 하겠다고 가진 모든 것들을 털어놓으면 된다. 연구 기간에 맞춰, 연구비 증액에 맞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맞춰서 말이다.

그리고 진짜 마지막..      
아무에게 (특히 비전공자) 한번 읽어봐 달라고 해서, 뭔 말인지 이해한다면 그냥 제출하면 된다. 
어차피 평가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제3의 누군가가 할테니.. 아무에게나 잘 읽히면 되는 거다.


 학생은 갑자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뭔가 다른 세상을 본 듯이 한참을  자기 계획서를 들어다 보더니, 과제 요구서도 확인 안 해 봤다고, 이만 가보겠다며 힘찬 걸음으로 내 방을 나갔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다고..



답은 다 가지고 있다. 본인이.. 단지, 꺼내든 카드가 적절한지 모를 뿐이다. 옳은지 확인하러 온 게 아니다. 

어차피 정답은 나도 모른다. 모범답안에 근접해 가며 배워나갈 뿐이다. 

과제 미선정이라는 실패가 주는 가장 큰 배움은 나의 글을 누군가 읽고 평가해 주는 일이었다. 누군가 시간 내서 내 것을 살펴봐 주고, 고민해 주고, 조언을 해 주었다는 사실.. 그게 지적이라도 난 억울하지 않았다. 간절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직접 겪은 경험이었다. 수차례 실패하고, 다시 반복하고, 그렇게 하다 보니, 글을 쓰면서 상대방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가자도 하나의 독자다. 내 글을 읽고 이해하고 나의 연구 역량을 보고 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 판단되면 내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나를 통해 배워나가는 누군가에 가서 나의 경험이 쓰임이 될 때, 나를 내어준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꽁꽁 쥐고 붙들고 아무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내 것을 비워낼 기회가 없다. 다시 채워낼 다른 경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내것은 없다. 배우고 겪고 채워나갈 때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내어 주는 것이다. 그래야 그게 내 것이었다는 것을 내가 아니라, 상대가 기억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녕! 브런치, 올해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