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History 11
금주는 독일공작연맹의 사상적 배경과 운동을 이끌었던 헤르만 무테지우스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헤르만 무테지우스에 의해 시작된 독일공작연맹의 가장 핵심사상은 “디자인은 용도에 맞게”라는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예술과 산업의 조화로 산업을 극대화시키자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디자인은 기능을 제외한 그 어떤 사상적 관점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기능이 없는 물건은 물건이 아닐뿐더러 그 어떤 형식으로도 수용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독일공작연맹은 독일 민족주의 의식과, 공업화를 통하여 가치 있는 예술을 대중에게 대량 공급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헤르만 무테지우스에 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민족주의라는 개념부터 조금 더 살펴본다면, “민족주의”란 정확히 한 국가의 전체 의지가 가진 통일성과 정당성에 관한 정치사상입니다.
흔히 민족주의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으로 표현됩니다. 민족주의는 그 역사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보는 이로 하여금 동경 또는 고무의 감정을, 혹은 증오 내지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통일된 민족주의란 사명 아래 자유와 독립으로, 혹은 억압과 침략을 정당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근대 세계의 역사에서 정치적 단위를 이루고 있는 “민족국가”의 다양한 역사적 발자취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예는 민주주의, 국제주의와 연결되는 진보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주의, 쇼비니즘, 배타주의로 대변되는 반 이데올로기적 측면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반 이데올로기적 사상으로 변질된 민족주의는 흔히 국수주의(Ultranationalism)라 불리며 타민족, 타국가에 대하여 배타적이며 초월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등이 대표적 예입니다. 국 수주 의의에 따르면, 민족문화가 외래의 이 질 문화에 위협받을 때,
민족문화는 스스로 “문화 방위”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질 문화의 침입을 방어하는 “토착 주의(nativism)”라고 하는 운동이 일어나며, 이 운동은 단순한 정신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전통적 사회의 혁신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분명 근본적으로 자국민의 우수성을 타국가에 대한 배타적 시각으로 바꾸어 말했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국가주의임에
틀림없습니다.
단일한 독립국가로서 주체적 확립을 했을 경우 민족주의는 앞서 말했듯 권력에 내재하는 공격적이고 침략적인 정서적 성격에 영향을 받아, 자국의 특권세력 유지 및 확장에 앞장서게 됩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역사를 보낸 독일이라는 국가가 근대 디자인사의 중요한 줄기 대부분을 점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자국민의 통일성과 정체성을 강화시키며 타문화와의 차별점을 주기 위해서는 시각적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근대 디자인의 본질적 특성을 독일의 민족성과 상호 비교해 보면 매우 유사한 측면이 많습니다.
20세기 초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달리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며 독일 내 정치적 분위기를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이와 달리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외국에서의 식민지 쟁탈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많은 원자재를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가격이 저렴한 원자재는 다시 저렴한 가격의 공산품을 생산하고 이를 세계 각국에 수출하여 많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정치적, 경제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900년대를 지나며 세계시장에서 독일 제품들은 타 국가와의 무역을 활발히 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제품들에 비하여 독자성이 떨어져 전혀 관심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국제사회에서의 독일은 정치, 경제적 위상이 낮아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해결책이 필요했으며, 그와 같은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이 바로 헤르만 무테지우스였습니다.
1907년 뮌헨에서 헤르만 무테지우스에 의해 수많은 건축가, 공업가, 공예가들이 모여 비로소 독일공작연맹이 결성됩니다.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건축가로서 영국의 합리적인 주택 건축이나 명쾌한 공예품 생산에 감명받아, 강연과 논문 등을 통하여 독일 공예계에 미술의 실생활화, 기계 생산품의 미적 규격화를 독일공작연맹을 통해 주장하였습니다.
헤르만 무테지우스의 이런 사상적 근원에는 아름답지 않은 일상 속에 미술(디자인)을 도입하자는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이 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로 대변되는 미술공예운동은 <미를 위한 미술이 아니라 실생활의 미화 운동>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독일공작연맹을 미술공예운동의 한 부류라고 오롯이 정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두 사조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윌리엄 모리스의 경우 수공업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복원시키기 위해 중세적 도제제도의 원리에 따른 무조건적 공예 개혁을 기도한 데 반해 독일공작연맹은 근대적인 산업적 생산 조건의 틀에서 접근을 시도했다는 데 있습니다.
도제제도란 쉽게 말해 중세 유럽 도시의 수공업 기술자 양성제도입니다. 일명 길드(동직조합)라고 불리며, 그 내부 조직은 도장인, 장인, 도제라는 3가지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4세기 후반부터 도제수업은 의무로서 제도화되는데 수업기간은 2~8년이며, 이 기간은 도장인의 집에서 도제와 침식을 함께 하면서 기술을 연수했습니다.
도제가 되는 연령은 10~16세이며, 도제 기간을 마치면 다시 3년 정도의 장인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장인 기간을 마치면 도장인으로 자격을 검증받기 위한 작품을 동업조합에 제출하여 기능심사에 합격해야 했고, 그 이후에 비로소 한 사람의 도장인으로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세 말기 이후에는 독립된 도장인이 되는 일은 매우 어려워 후계자 양성이라는 본연의 뜻도 쇠퇴하게 됩니다. 그 후 공장제 수업의 발전에 따라 도제제도는 해체되었으나, 도제제도가 가진 장인정신이나 수공예적 미학은 유럽 디자인의 정신적 기틀이 되었습니다.
도제제도의 커다란 교육적 특징 세 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교육자(도장인)와 도제와의 관계가 인격적이었다.
둘째, 기술교육과 인간교육이 병행되어 이루어졌다.
셋째, 장래의 지위를 보장하는 교육이었다.
아직도 유럽의 많은 디자인 대학들은 이러한 도제제도의 정신을 계승해 디자인 교육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부러운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디자인 이론가 최범 선생님은 한국인의 디자인 인식의 편협함을 공예와 국가주의 상관관계로 재설정합니다.
최범 선생님은 책에서 한국 사회에서의 디자인은 구체적 개념보다 추상적 이미지로 소비되며 디자인이 매끈하고 세련된 상품 껍데기로 치부되거나 대중을 압도하는 스펙터클로 작용하는 것은 디자인이 기득권의 전유물로 전락하며 관조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역사적 원흉으로 1967년 박정희의 “미술 수출”정책을 크게 비판합니다. 최범 선생님은 박정희의 “미술 수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사회에는 디자인 주체가 국가, 기업, 시민인데 대개 기업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해요. 자본주의 문화에서 생산자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은 유독 국가가 디자인 행위자로 등장해요.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근대화 과정과 디자인이 결합해 있는 거죠. 이러한 국가 주도 디자인의 씨앗이 바로 박정희의 ‘미술 수출’이에요.”
박정희의 “미술 수출”정책은 디자인 역시 국가의 동원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오직 수출을 염두에 두고 팔리는 디자인 작업을 수행하라는 무조건적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미술 수출”은 한국 디자인의 신화이자 유일 이념이 되었으며, 한국이 겪은 식민지적 근대, 국가주의 개발 이데올로기, 디자인의 도구화 등이 이 이념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디자인이 국가 발전, 부의 증대, 소비 촉진에 동원되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그 결정판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디자인 서울 정책”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물론 “디자인 서울 정책”이 일반인들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환기 차원에서는 크게 도움을 줬다는데 동의하지만 최초의 의제 설정이 잘못됐다는 명확한 사실에 가슴 한쪽이 아려옵니다.
최범 선생님의 대안은 당연하게도 시민이 디자인의 주체로 나서는 것이라고 합니다. “디자인은 삶을 조형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하는 그는 마을공동체 운동, 텃밭 가꾸기 등을 삶을 담은 디자인의 좋은 사례로 들었습니다.
디자인은 보이는 객관적 사물이 아니라 내 삶, 내 경험과 분리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디자인이란 시민이 디자인을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편안하고 윤택하게 살 수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최범 선생님의 이러한 의식의 저편에는 분명 윌리엄모리스가 행했던 예술공예운동의 의제를 다시금 이 땅에 복원시키려는 강한 의지가 묻어납니다.
유럽의 경우 윌리엄 모리스로 대변되는 미술공예운동과 그 파생 사조(독일 공작 연맹, 시세션 등) 들에 의한 정신적 기틀을 충분히 마련할 시간적 여유를 가졌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로 대변되는 “미술 수출”이라는 강제적 명령하에 디자인을 포함한 상업예술들은 오로지 대외적 수출을 위한 경제의 하위 층위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제대로 된 공예 제도를 거쳐 모던으로 넘어온 사회와 국가 주도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모던이 외삽된 사회 간의 차이는 정신적 성숙에서 실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주도에 의한 산업 부흥이라는 관점에서 비추어 보면 독일공작연맹과 박정희의 미술 수출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사 관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독일공작연맹이 시작되는 당시 사회는 합리주의라는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이 있었으며, 이 시기에는 새로운 양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실용적, 또는 기술적인 해결들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회 문제에 대한 실질적 해결 방식을 시각문화의 개선으로 해결하려는 자세에서 미술과 디자인을 자본 밑에 깔아 두는 박정희의 “미술 수출”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합리주의(rationalism)란 쉽게 말해 비합리적, 우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이성적, 논리적, 필연적인 것을 중시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합리주의는 단순히 전통적인 풍습 등에 따르거나 주관적인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특질이 있습니다.
또한 이성의 올바른 활용을 통해 우리가 절대적으로 올바른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 즉 합리주의는 기본적으로 기계적 세계관을 띠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계와 삶이 기계처럼 어떤 인과율에 의해 지배될 때 우리의 이성에 의해 가장 완벽하고도 합리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합리주의의 저변에 깔려있습니다. 합리주의에 대해 주장했던 대표적인 철학자들로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니츠 등이 있습니다.
독일공작연맹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예술가적인 차원에서 산업적인 표준화, 제품들의 규격화를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의 미술 수출과의 가장 큰 차이점) 장식과 기능성 사이의 수요를 예측하는 합리적인 과정을 통하여 소비제품에서 기술적인 경향이 강하게 보였습니다.
연맹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독일공작연맹은 운동의 단계보다 조금 더 크고 조직화된 단체입니다.
쉽게 말해 국가적 지원을 등에 업고 시작된 중요한 국책사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미술 수출과의 유사점이 있습니다.)
이 당시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영국에서 일을 하면서, 영국 현지의 미술공예운동, 아르누보, 시세션 등의 사상적 변혁의 과정들을 지켜봤고 독일에 돌아와, 각 나라의 주요 사상들을 버무려 “디자인은 용도에 맞게”라는 독일공작연맹의 핵심사상을 생각해 냈습니다.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산업 중심과 예술 중심 중의 택일이 아닌, 디자인과 산업을 같이 발전시키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산업혁명 시대의 저품질 제품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혀 나오는 방식이 아니라 디자이너들에 의해 아름답지만,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디자인들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자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미술공예운동과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공장적 환경과 공예적 환경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시대적 흐름인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커다란 계기가 될 것이라고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고쳐 말하자면, 초기 산업혁명 당시는 질이 떨어지는 싸구려 제품의 대량생산(오직 산업화 단계만 있을 뿐이었던 시기)이 주를 이루던 시기였고, 과거로 돌아가서 공예적인 미학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사상과 대립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구조 속에서 산업화와 예술을 화해시키자는 단계로 진화해 나가게 된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시세션과 독일 공작 연맹이 의의를 두었던 산업화와 예술의 화해는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시대에 맞는 생산방식, 시대에 맞는 재료, 형태, 구조 등을 응용하거나 발전시켜 나갑니다.
이러한 요소는 근대 건축의 큰 토대를 마련합니다. 근대 이전의 건축이 튼튼한 돌기둥 사이에 아름다운 아치로 장식하고, 유리창 앞에는 멋들어진 발코니에, 호화로운 장식으로 화려하게 입면을 표현하던 고전주의 방식의 건축이라면, 산업혁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유리와 철근, 콘크리트, 철골 등의 시대에 맞는 재료들을 건축물의 주재료로 사용했고 이 재료들을 이용해 합리적인 형태와 기능적인 공간 구성을 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간단하고 튼튼한 구조를 만드는 데 주안점을 주는 건축이 대세가 되는 이때를 근대 건축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독일공작연맹 이후 산업과 예술의 조화로운 상황으로 거듭나면서 독일의 산업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독일 공작 연맹이 결성되고, 월터 그로피우스가 몇 년 후에 이 단체에 속하게 됩니다.
월터 그로피우스는 후에 바우하우스라는 교육시설을 만듭니다. 월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는 “예술, 공예, 공업”을 통합한 디자인을 추구하는데 이러한 사상적 영향의 시발점이 바로 독일공작연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독일공작연맹의 역사적 의의란 아래와 같습니다.
" 첫째, 산업과 예술의 접목을 통해 두 가지를 동시에 발전시킬 방향을 모색했다.
둘째, 기능, 실용성, 합리성, 경제성 등을 고려한 디자인을 중시했다.
셋째, 바우하우스 건립을 통해, 공업+공예+예술을 통합한 디자인을 교육시키려 했다.
넷째, 이런 과정을 겪으며 독일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고 그들의
사상이 시대 흐름상 맞다는 것을 증명했다."
독일공작연맹의 사상중 대부분은 근대건축의 사상으로 귀결되기도 합니다.
재료의 규격화와 산업화를 통해 대량생산이 가능한 유리, 철골, 철근, 콘크리트 등을 건물의 주재료로 사용하면서, 빠른 속도로 시공이 가능해졌습니다.
덧붙여서 말하면 산업과 예술의 접목을 통해 바라본 건축이 산업과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시공법, 건축자재, 구조학 등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건축 디자인도 그 발전을 그대로 받아들여 형태적으로 발전되거나, 구조적으로 발전되는 등의 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보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근대건축에서 크게 중시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근대건축의 시발점이 된 것이 독일공작연맹이며 독일공작연맹의 부회장까지 올라가는 “미스 반 데 로에”를 포함해 “월터 그로피우스”까지 근대 건축의 주요 인물 두 명이 독일공작연맹 출신입니다.
이렇듯 하나의 커다란 사상적 흐름은 훗날까지 이어져 현세대에 많은 직간접적 영향을 끼칩니다.
앞서 말한 우리나라 디자인 산업의 시발점이 만약, 국가 주도의 “미술 수출”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더라면 지금의 우리 디자인 환경이 어떻게 변했을까 하고 상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생각일 것 같습니다.
– 라이트브레인 가치디자인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