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 Nov 21. 2022

일방적 교감의 편린

에세이 연습 과제 16 - 특별한 교감 이야기


나는 우리 부모님의 첫째 딸이다. 내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는 야근하느라 병원에 오지도 못했다. 회사 살림이 제 가정 살림보다 우선시되던 그때, 남자가 애 낳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휴가를 쓰냐고 상사에게 면박받던 그날, 나의 첫딸이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나오는 중이니 꼭 마중 나가야겠다고 말도 못 꺼낸 아버지는 회사에서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셨을까. 요란했던 분만실을 나와 엄마 품에서 그새 쌔근쌔근 잠든 나는 모해 모월 모일 모시에 세상을 향한 첫 포효로 생명의 탄생을 알렸건만 아버지를 보는 데는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지금도 이때를 회상하며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들이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


(라떼는) 딸들은 첫 돌 때, 돌 복으로 왕비 옷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첫째는 딸이니, 둘째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할머니가 우기는 바람에 나는 임금 옷을 입고 돌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내 돌 사진만 보면 아무도 나를 딸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게 내 성별을 희생하여 생애 한 점뿐인 돌 사진을 남자 모습으로 찍었는데도 여동생이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아닌 구박을 받았다. 둘째를 남자 이름으로 불러야 셋째는 반드시 아들이 나온다고 이름도 남자 이름으로 지었다. 평상복도 남자처럼 입혔고, 머리카락도 숏커트로 잘라 키웠다. 나는 셋째의 성별은 나와 내 여동생이 아니고 아버지의 염색체가 정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드디어 귀한 아들이 태어났다. 할머니는 나와 내 여동생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우리 집안에서 아들 보려고 먼저 나온 것들이야. 알겠니?’ 나는 모른다고 말하는데 실패했다. 할머니는 이상한 분이셨다. 남동생이 태어나던 날, 입을 잘 못 놀리면 귀한 손자 앞날에 부정 탄다고 회사에 있던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또 딸이 태어났다고 거짓말을 했다. 우리 아빠는 또 딸이란 얘기를 듣고 수화기 너머로 ‘에이씨’라고 대답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할머니한테도 아빠한테도 아들 앞날에 부정 타면 안 된다면서 왜 딸이라고 말했으며, 또 딸이란 소리를 듣고 왜 속상해했는지 묻는데 실패했다. 이런, 일타쌍피 급의 실패였다. 남동생이 누나에게 대들 때도, 할머니는 어디 계집들이 사내를 화나게 하나며 나와 둘째를 홀딱 벗겨 집 밖으로 쫓아냈다. 나는 그날 수치와 부끄러움을 배웠지만, 같은 여자인 할머니가 이렇게까지 하는 의중을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엄마표 닭곰탕을 좋아했다. 요리는 엄마가 했지만, 우리에게 밥을 퍼주는 건 할머니의 몫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는 살코기 반 닭 껍질 반짜리 닭곰탕을, 둘째에게는 닭 껍질 닭곰탕을, 셋째에게는 살코기 닭곰탕을 내주었다. ‘할머니 왜 둘째한테는 닭 껍질만 줘?’ ‘걔는 닭 껍질 좋아해.’ 국에 닭고기도 없고 졸지에 이름도 없어진 '걔'는 자기도 살코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실패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마주한, 마주하는, 마주 할, 많은 실패가 일방적인 교감에서 비롯한다. 교감이 본디 뜻을 잃고 일방적이라는 의미는 역설 그 자체이며 당사자 사이에 지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뜻도 된다. 우리 아빠도, 할머니도, 심지어 어린 남동생까지 모두 나보다 우위를 점하는 부분이 있다고 여겼기에, 합일되지 않은 감정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면서도 내가 느끼는 실패에는 공감하지 못한 것일 테니. 그들이 진정한 교감을 진심으로 원했다면, 감정 교류에 성별의 우열을 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을 때부터 내게 불어올 일방적 교감의 바람에 얼마든지 흔들릴 준비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보잘것없는 식물이 작은 잎 하나를 피워내는 데도 수도 없이 많은 체관을 찢어내야 하는 법이다. 여자로 태어났기에 일방적인 교감에서 비롯한 실패를 더 많이 겪어야 하는 거라면 기꺼이 그러겠다고 다짐했다. 일방적 교감의 편린이 기억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곧, 나로 하여금 교감의 진정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장치다. 교감의 진정성은 자신의 내면을 보이고, 상대의 진심을 보는 것에서 온다. 영화 아바타에서도, 아바타와 나비족은 ‘I see you.’라는 한 마디로 대변되는 교감을 나누기까지 수많은 갈등과 실패를 겪는다. 인간의 정신으로 조종하는 아바타는 겉모습이 나비족과 똑같았음에도 처음엔 그들을 이해하지도, 그들의 공동체에 흡수되지도 못했다. 영화의 말미에서 아바타가 내뱉은 말, 'I see you.'는 서로를 바라보는 인간과 나비족의 상반된 시선이 있는 그대로의 순수성으로 향하고 나서 진정으로 달성한 교감의 결과를 상징한다. 자신과 타인의 외형의 유사성이 아니라 개인 내면의 진심을 ‘보이고 보는 것’이 교감의 본질이자 진실인 까닭이기에.





작가의 이전글 이방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