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國歌)는 나라의 정치적 현실과 국격을 반영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는 이에게 자랑스러운 마음을 고취해야 합니다. 국가는 '현대판 토템(totem)'이거든요.
토템은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이 고안한 개념입니다. 그에 따르면 토템은 특정 부족이나 집단이 숭배하는 상징물로서, 그 집단의 정체성과 신성함을 나타내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토템은 집단의 사회적, 종교적 신념을 대변하며, 그 집단 구성원들이 공통의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식을 불러일으켜 그들 사이에 소속감을 강화하고 연대를 촉진하지요. 모집단(母集團)의 토템은 구성원들의 마음속에서 자신을 집단 밖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구별하는 상징으로 자리합니다. 나 자신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토템은집단이 '우리가 닮고 싶은 존재'로서그들 자신을 이상화한 형태를 띠게 됩니다.지렁이나 바퀴벌레 같은 나약하고 불결한 미물들을 토템으로 받드는 민족이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당장 우리나라 프로야구 구단만 보더라도, 호랑이, 사자, 독수리, 곰 같은 사나운 맹수와 맹금을 마스코트로 씁니다. 개와 고양이가 우리에게 참 친숙한 존재지만, 인간 손에 쉽게 길드는 유순한 동물이기에 매 경기 '적과 싸워 이겨야'하는 프로 선수들의 토템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놀림거리가 될 겁니다. 프로야구 팬들이 상대 팀을 비하할 때 '고양이', '닭둘기'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인도네시아의 국장 가루다 빤짜실라(Garuda Pancasila)
이제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들여다볼까요? 예로부터 인도네시아의 통치자들은 힘 있고 당당한 독수리 모습을 한 상상 속의 새(鳥) '가루다(Garuda)'를 악을 물리치고 진리를 수호하는 존재로 받들고, 이를 국가의 보호자이자 힘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현대 인도네시아 국가의 건국자들에겐 수많은 종족과 섬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상징이 필요했고, 그래서 '다양성 속의 통일(Bhinneka Tunggal Ika)'이라는 문구가 적힌 리본을 가루다가 억센 발톱으로 꽉 움켜쥐는 형태의 국장(國章)을 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인도네시아가 다민족, 다문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통합된 국가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국민과 외부 세계에 전달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적 토템으로서의 국가 상징물은 국가가 스스로를 정의하고 이를 대내외에 알리는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활용됩니다. 만약 정치 드라마의 각본이 바뀐다면 국가도 바뀌게 됩니다. 호메이니가 죽고 나서 이란의 국가도 그런 운명을 맞이했지요.
따라서 국가를 상징하는 노래 역시 미리 짜인 각본에 따라 지어져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 혹은 민족 공동체가 국가(國歌)를 요청하면, 창작자는 국가와 민족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과 과거의 영광, 굴욕의 청산, 위대한 미래를 약속하는 정치적 상징물로서 곡을 내놓는 겁니다. 신들린 영감으로 악상이 떠올랐다고 하더라도 제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와게 루돌프 수쁘랏만도 하나로 뭉친 인도네시아 네이션(nation)을 위한 노래가 필요하다는 민족 지도자의 호소를 '팀불'(timbul, 인도네시아어로 비상(飛上)이라는 뜻)이라는 잡지에서 읽고 곡을 지었거든요. 비타협 민족주의자 무함마드 야민이 쓴 시 구절이 와게가 지은 '인도네시아 라야'의 노랫말에 들어갔습니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던 수많은 민중이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피를 대지의 어머니 '이부 뻐르띠위(Ibu Pertiwi)'의 자궁에 다시 뿌리고 뿌려 태어난 나라 인도네시아도 영웅들의 투쟁에 걸맞은 노래가 필요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애국심을 표현할 때 '하르가 마띠(harga mati)'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하르가'는 '값', '가치'를 뜻하고, '마띠'는 죽음을 뜻합니다. 즉, 나라는 목숨을 걸고 지킬 가치가 있다는 의미이지요. 구성원들이 목숨을 바쳐 세운 새 나라를 상징하는 국가라는 짐을 와게 루돌프 수쁘랏만이 남기고 떠난 '인도네시아 라야'가 짊어지기 위해서는 수정 작업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에는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큰 별, 수카르노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게 됩니다.
참고문헌:
Karen A. Cerulo. (1993).Symbols and the World System: National Anthems and Flags. Sociological Forum.
Joseph Zikmund II. (1969). National Anthems as Political Symbols. Australian Journal of Politics &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