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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Dec 19. 2023

쓸모

 주말에 만난 둘째가

 "엄마 머리는 왜 이렇게 퍼석해?"

 라고 차 뒷자리에서 내 머리를 만지며 물었다. 타고나기를 곱슬곱슬하고 푸석하게 물려받기도 했고, 석 달에 한 번 매직 스트레이트를 해야 사람다워지는 머리인 터라 손상을 받아 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내 별명은 6년 내내 '옥수수'였다. 내 머릿결의 유구한 역사를 일곱 살 아이에게 한 번 풀어봐 줄까 하다가 그냥,

 "어. 그게 엄마 트레이드 마크야."

 라며 넘어갔다. 뭐,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딸들에게든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든 쁜 모습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은 늘 있는터라 일을 마치고 미용실에 들렀다. 이 동네로 이사오며 늘 가는 그곳이다. 거기 원장님은 내가 이혼한 것도 알고, 아이가 있는 것도 알고, 평소의 모습과 피곤할 때의 모습 같은 걸 자주 봐서 안다. 작년에는 한 번 원장님의 대학원 영어 시험을 도와주어서 내가 영어를 곧잘 한다는 사실 또한 안다.

 그 옆에서 늘 도와주시는 선생님 한 분은 이 미용실에서 스태프로 시작하셨는데 얼마 전 디자이너로 승급을 했다. 그분이 거의 처음 미용을 시작했을 때부터의 성장을 쭉 봐 온 한 고객으로서 너무 흐뭇해 지난번에는 선물로 와인을 한 병 드렸다. 우리는 서비스를 해주는 미용사와 고객이라는 관계지만, 얘기를 나눌 때는 정말 친한 친구 같을 때도 종종 있다.




 오늘은 어쩌다 대학 때 캠퍼스 커플을 한 원장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원장님은 남자분인데, 미용대학에서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거기서 두 번 캠퍼스 커플을 하느라고 미팅 같은 건 한 번도 못해보셨다고 했다.

 "누가 먼저 고백했어요?"

 라는 내 질문에

 "늘 저는 "네가 싫지는 않아."라고 대답했는데, 어느 순간 여자애들 사이에서 사귀는 게 되어있더라고요."

 라고 말해 우리를 웃겼다.

 늘 그렇듯 옆에서 보조를 해주시던 다른 선생님은

 "저도 대학에 가 보고 싶어요."

 라고 했는데 그분은 직업 군인 출신이라 대학에는 가시지 않고 바로 미용을 시작했나 보았다.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대학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거의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공부하느라 힘들고 학점 때문에 속상한 적도 많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교대 우리 과에는 전국의 전교 1등들이 모여있었다. 하지만 그게 결코 대학 시절을 대표하는 테마는 아니다. 왜냐하면 힘들기도, 또 중간중간 좋기도 했던 대학 생활은 3학년 말부터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따뜻한 기운이 많이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캠퍼스 커플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교대 남자는 어딘가 부족해 보여서 캠퍼스 커플이 부럽지 않았었다. 그러다 딱 한 번 부러운 때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4학년이 되어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였다. 열심히 공부하는 교대생 중 다수가 학교 도서관에 많이 자리를 잡았었는데, 경쟁이 치열해서 새벽부터 줄을 서곤 했다. 자리가 인원에 비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캠퍼스 커플은 서로의 자리를 맡아주었는데, 바로 모습에서 나는 교대 생활 처음으로 캠퍼스 커플이 부러워졌다.


 "그때 남자친구가 방위산업체 다녔었는데, 저는 남자친구 학교로 불러서 임용고시 모의고사 풀고, 남자친구는 답 매겨주고. 좋았어요."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의 '쓸모'를 높이 평가하고, 그로 인해 여전히 그 시절을 좋게 평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당시 남자친구를 많이 좋아했던 마음적인 부분을 설명하는데도 이런 실용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말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간에 나는 실용적이고, 그런 맥락에서 사람에게 마저도 쓸모를 따지는 것인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 생일 때 하필 남자친구가 한 달짜리 훈련을 논산으로 갔는데, 미리 이벤트 업체에 얘기해서 강의실로 어떤 사람이 꽃을 들고 노래하면서 왔지 뭐예요? 그래서 동기들 다 같이 손뼉 치고 축하해 주고 그랬어요."

 그래, 세상 행복한 한때였다. 아무도 부럽지 않은.




 이십 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지금, 그때의 나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직도 대학 다닐 때만큼 무언가의 용도를 재는 건 아닌지, 혹시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할 때 그렇게 하는 습관이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얼마 전 가만 되돌아보니 나는 이성을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하고 좋아했던 적이 거의 손에 꼽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어떤 사람이든 그의 단점이 먼저 보이고 잘 보인다. 이성의 경우에는 콩깍지가 씌어있다가도 그게 풀리고 난 뒤에는 안 좋은 점이 아주 크게 다가올 때가 많고, 처음부터 현실적인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멀어지기도 잘한다. 그렇게 꽂혀버린 안 좋은 점이 너무 커 보여서,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계산도 잘해서 서운한 일이 생기면 차곡차곡 적립해 두었다가 나중에 상대방에게 써먹는다. 나름의 핑계겠지만 '그때 가 이랬으니까'라는 정당화를 하며 말이다.


 이제 계산은 접어두고, 할머니가 아픈 손자 배 만져주듯 누군가에게서 보이는 안 좋은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쪽의 사람이 된다면 좋겠다. 뾰족 튀어나온 내 모서리에는 '페르소나'라는 따뜻한 천을 급한 대로 씌워주며 '나란 사람쓸모'는 뭘까 질문해 본다. 상대의 단점까지, 그리고 그 단점을 보는 나 자신까지 안고 과연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 나도 궁금하다.  또한 단점 투성이인 한 인간임을 깨달으매, 왠지 나의 쓸모는 그렇게 가만가만 세상 모든 이의 단점에 약을 발라 주려고 세상에 온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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