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희 Jan 09. 2024

다시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갈 용기

 지난가을, 상담 선생님이 그러셨다.

 “보통 이 정도 일을 겪으면 아예 사람을 안 만나고 지내는 분도 많은데, 주희 씨는 그렇지 않으시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겁이 많고 낯도 가리는 성격인지라 여중, 여고를 나오고서 대학생 때는 남자와 이야기만 해도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던 기억이 난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라는 걸 정상적으로 사귈 기회 자체가 부족했다. 엄마에게 내 친구는 곧 공부를 방해하는 적군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와 친해지거나 어떤 무리에 자연스럽게 소속돼 본 일이 드물었다.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은 더없이 서툴렀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나만 바라보았으면 하는 유치한 질투를 하기도 했다. 잘 모르는 사람과 친해지는 일은 그래서 더더욱 없었다. 공부만 하느라 친구들과 방과 후에 떡볶이를 함께 먹을 수 없던 나는 그래서 참 많이 오래 외로웠다. 어떻게 해야 사람과 친해질 수 있는지 그 방법도 터득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렸다.




 석양이 예쁜 동남아시아 한 곳으로 나는 지금 휴가를 와있다. 여기서 패들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가 지는 해를 보았는데, 그날 한국 여자분 한 분과 같이 가게 되었다. 우리는 같은 업체를 통해 예약했고, 유일한 한국인 두 명이었다.

 쌍꺼풀 진 짙은 눈이 나와 달라 참 예뻤다. 처음에는 몸이 커서 좀 놀라기는 했다. 그리고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표정이 자신이 없어 보였다.

 먼저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건넸다. 아마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굳이 말을 걸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모든 게 다 귀찮다는 무의식적인 아우라가 그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유일한 한국인 여행자 둘답게 우리는 패들보트 타는 동안 자주 붙어 다녔다. 가이드가 한국말을 잘 못해서 굳이 우리 둘을 같이 보트 옆에 세우고 사진을 찍을 때도 둘 다 안 찍겠다고 극구 사양하지는 않고 마지못해, 하지만 나름 즐겁게 모델이 되었다.

 그 사진은 나중에 받고 보니 수영복만 입은 내 몸과 그분의 큰 몸이 대비되어 어쩌면 그분이 속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옆에 있으면 자존감이 깎이는 가까이 가기 싫은 사람이었을까?




 그녀는 패들링 중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무려 네 번이나 물에 빠졌다. 나는 일어서지는 못하고 앉아서 잘 가다가 바람이 거세지자 목적지 저 밖으로 밀려났다. 우리는 각각 가이드의 배에 묶여 선셋을 감상하는 포인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기 싫다는 그녀를 설득해 패들 보트 옆에서 찍어주었다. 한 번 그랬더니 바다에 나가서는 조금만 권해도 곧잘 찍었다. 그날 약간 구름이 끼긴 했지만 사진을 찍지 않기엔 너무나 아까울 만큼 풍경이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와 저녁 식사라도 할까 싶었지만, 일관되게 방어적인 그녀의 보호막을 뚫고 들어가기까지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안녕히 계세요. “

 나이는 얼마일까? 나는 겨우 그녀가 사는 곳이 서울이라는 것만 알아내고 그녀를 보내주어야 했다.


 사람과 사람이 친밀해진다는 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꼭 남녀 사이에만 ‘기적’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누구나 살면서 인간관계로 인해 크고 작은 힘든 일을 겪는다. 나도 겁이 많은 탓에 먼저 다가가기가 쉽지 않거나, 어느 정도 친해진 후에는 선을 긋고 마음을 더 주지 않으려 애쓸 때가 많다. 그게 세상을 잘 사는 일종의 지혜라 믿으며.

 그래서 이미 친밀해진 몇 안 되는 나의 친구와 연인이 너무너무 소중하다. 이 험한 세상에, 나를 보일 수 있는 누군가가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있다니. 축복받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게 마음의 문을 열고 용기를 내는 사람에게 혹시 내가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기를. 혹시 나로 인해 누군가가 다시는 아무와도 친하고 싶지 않아지지 않기를. 그리고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나에게 조금이나마 있기를.

 그리고 올해는 누군가로 인해 힘들어보았던 우리 모두가, 다시 누군가와 친밀해질 수 있는 용기를 낸다면 좋겠다.

 패들보트 때 만난 그 동생이 서울에서라도 같이 밥 먹자고 해주면 좋겠다. 그녀의 얼굴에 따뜻한 환희가 피어나는 걸 보고 싶다. 하지만 먼저 말하지는 못하고 괜히 한국에 잘 도착했는지만 에둘러 물어보았다. 만약 훗날 언젠가 자연스럽게, 그리고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져 있기를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우연히 36세 11개월의 나를 다시 만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