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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Feb 13. 2024

가족력

 "가족력이 제법 되시네요."

 의사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외삼촌과 엄마의 암 명을 일일이 짚어 묻더니 말했다. 위암 그리고 재발, 직장암, 뇌암, 자궁내막암을 순서대로 얘기하는 대로 의사는 차트에 적어 내려갔다.

 "외삼촌은 어떤 뇌암이셨지는 모르시는 거죠?"

 그렇다고 했다. 뇌암에도 종류가 있는 건가.


 이삼주 전부터 왼쪽 가슴에 통증이 있었다. 작년 건강검진 초음파 때 뭐가 보인다고 해서 오른쪽 가슴을 맘모톰으로 조직검사 했다. '조직 검사'라는 말에 별별 생각이 다 들만큼 가슴을 졸였는데 다행히 별 일 아니라고 했다. 덕분에 오른쪽 가슴을 기다란 침으로 찔러 조직을 떼어내는 아픈 경험을 하긴 했지만, 암이 아닌 걸 확인한 데 비하면 대수도 아니다.


 외갓집 식구의 반 이상이 암을 앓았다는 사실은 이렇듯 때때로 내게 공포로 다가온다. 어렸을 적 보았던 외할아버지의 당겨서 연 잔칫날은 어른이 된 지금도 생각난다. 그건 달리 더 손 쓸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집에서 마지막으로 자식과 손주와 함께 일부러 날을 잡아 치른 잔치였다. 그래서 그 잔치는 순간순간이 수많은 사진으로 남아있고, 그 사진 속 할아버지 모습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 당시 육십이 넘으셨던 백발의 외할아버지는 서태지의 컴백홈에 맞춰 넥타이를 그 성성한 머리에 묶고 어색한 춤을 추셨다.




 언젠가 죽는다는 건 세상 모두에게 해당하는 명제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 아파져서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 건 싫다.

 외가의 암 이력이 이렇게 어딘가 불편해서 병원에 갈 때마다 인생에 대한 의문을 하게 한다. 내가 만약 내일 암 진단을 받는다면, 이라는.


 의사 선생님은 고통스럽게 유방을 압착해 찍은 엑스레이와 초음파 사진을 보시더니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판독에 시간이 좀 걸려요. 왼쪽 가슴에 4미리짜리 혹이 있는데 별 거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언제 오셔서 결과 들으실래요?"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가장 빠른 날짜를 물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불확실의 공포를 떨쳐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금요일에 아마 나는 별일 없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가끔 가슴은 제 풀에 혼자 아플 수도 있구나'라고 여기면서.

 아직 더 하고 싶은 일이 많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싶지도 않다. 내 발로, 건강히 하루를 웃으며 보내고 싶다. 그냥 더도 말고 그거면 될 것 같다. 큰 부자가 아니어도 좋고 엄청난 서사의 주인공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그저 별일 없이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주어진 시간을 뜻깊게 보내고 싶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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