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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Stout Aug 12. 2020

<그리스인 조르바>와 보잘것없는 나

나는 영화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다고

    2015년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며 지겹도록 가방에 들고 다녔던 책을 이제야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2년 전, 항상 틈이 나면 읽어 두려고 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리듬이 끊기면 다시 열어보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항상 그러해 왔지만, 나는 결국 반강제로 이 책을 다시 열어보게 되었다.

    항상 한 해, 한 해를 넘기다 보면, 정말로 나의 삶이 신이 써 내려간 하나의 시나리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하게 기막히게 타이밍을 맞추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하는데,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비슷한 경우인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나를 조르바에게서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필요했던 질문을 니코스 카잔스키의 소설 속 ‘나’ 역시도 해온 것 같았고, ‘나’는 조르바에게서 그 답을 얻었다.

     니코스 카잔스키는 크레타의 이라클리온이 1883년에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기에 태어났다고 한다. 조금 더 찾아보니,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나오는 테마인 자유에 대한 갈망이나 정신적, 영적인 갈망 등은 이 시기에 태어난 작가의 삶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가 겪었던 것처럼, 그리스 역시 전쟁의 상처, 그리고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시기였다. 물론 그런 시기에서 살았던 조르바가 말하는 ‘인간의 유한성과 촛불처럼 꺼져버리는 죽음’이 지금의 나의 삶에 있어 독립운동과 같은 물리적으로 치열한 외부와의 싸움은 아니지만, 책에서 드러나는 그의 삶은 지금 내가 하루하루 겪어내는 시간을 싸워내는데 큰 용기를 주었다. 적어도 내게 조르바는 철저히 외부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어린 날의 나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튀는 사람이었다. 내가 의도한 경우이든, 의도하지 않은 경우이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잘 끌어내고는 했었다. 좋게 말하면 관심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소위 미친놈이거나 관심종자였다. 내가 나를 그런 모습으로 포장하려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내 머릿속에서 드는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는 습관이 있었고, (아마 집에서의 모습과 바깥에서의 모습이 달랐던 부모님의 모습에 대한 반항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다른 아이들이 듣기에는 다소 거북했을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커가면서 큰 문제가 되어갔다. 보고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 정직이라는 것은 항상 미덕인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있는 조직이 돈이 많아지고, 사람이 많아지고, 이해관계가 더 조밀하게 얽혀있을수록,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의 순간들은 점차 많아졌다. 나만 혼자 또라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을 빚거나 상처를 주게 되는 경우도 잦아졌고, 나는 나의 행동과 말을 더 조심하게 되었다. 내가 21개월간 복무했던 군대에서, 회사에서, 학교에 이르기까지 나는 더 작은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알아도 모르는 척, 모르면 그냥 모른 척.

    <그리스인 조르바> 속 조르바는 ‘나’의 철학적인 질문을 단순하면서도 자신 있게 받아친다. 그의 말에는 스스럼이 없고,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을 아는 사람처럼 거침이 없다. 뭔가 조르바의 태도가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나보다 더 많이 배우신 분들 역시 그런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누군가가 이야기하길, 조르바는 니체가 주장해왔던 삶을 ‘그냥’ 살았다. 영원한 자유인이면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순수하게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자유를 갈망하고 있지만 이미 자유로운 자유인. <그리스인 조르바> 속 조르바는 내게 그런 인물로 다가왔다. 죽음의 순간조차 두목 (‘나’)에게 보여주지 않고 자신의 산투르를 (악기)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던 그의 모습이, 불꽃같이 살아왔던 그의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생애가 못내 부러웠다. 시선을 거의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어렸을 적, 순진했던, 혹은 순수했던 나의 모습이 그에게서 보였다. 당연히 카잔스키는 조르바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조르바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이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면서 살 수 있었던 내가 굳이 영화라는 예술계의 발을 디딘 것은 결국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렸을 적 내가 잠시나마 가졌던 조르바의 모습. 자유로웠던 한 남자의 모습이 그리웠고, 이미 커버린 나의 삶 속에서 나는 조르바가 될 수 없었다. 아니, 이미 내가 어른 놀이를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가족이라는 연, 학연과 관계라는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조르바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술이란 내게 잠시나마 조르바로 살 수 있게 해 줄 것임을 알았다. 조르바가 될 수는 없지만, 잠시나마 될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이 지금이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쏟은 적은 많다. 다른 사람은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 나는 영화를 통해 가장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즉,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짧게는 10분 남짓에서 길게는 2시간까지,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아낼 수가 있다.

    ‘그런 거였나?’ 나는 책을 읽는 도중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아내고 싶은 내가, 결국에 택한 것은, 아니, 어쩌면 필연적으로 이 길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조르바와 같았던 어린 나처럼 살기 위해서는, 나는 영화를 해야만 했었다. 물론 조르바가 나의 이런 말을 들으면 코웃음 칠 것이 뻔하다.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 밤이고 낮이고 나는 전속력으로 내닫으며 신명 꼴리는 대로 합니다. 뒤집혀 박살이 난다면 그뿐이죠. 그래 봐야 손해 갈 게 있을까요? 없어요. 천천히 간다고 골로 안 가나요? 당연히 가죠. 기왕 갈 바에는 화끈하게 가자 이겁니다.”

 

   그래. 내가 책을 다 읽고 이 글을 쓰며, 글을 쓰면서도 가끔가끔 책을 뒤져보며 조르바가 했던 말을 다시 보고 있자면, 조르바가 지금 내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하다. 인제 그만 생각하고 달리라고. 생각은 그만 멈추고, 자기를 따라오다 보니 도착 한 곳이 바로 여기라면, 그냥 한번 해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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